한국 ‘소공동체’ 뿌리의 역사적 이해
1 초창기 한국천주교회 신앙 교우촌
1) 조선 후기 마을문화의 핵심은 혈연과 지연중심으로 정신문화와
노동문화의 두 가지 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마을 굿이 전자의 예이고 두레굿이 후자의 예이다.
조선 후기의 마을 공동체의 문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민중생활의 공동체성은
보편적 평등성, 공동체적 참여정신, 두레굿의 공동체적 참여정신
그리고 축제의 문화로서의 마을의 공동체 문화의 특징을 보여졌고
특히‘대동(大同)’이라는 말속에서 쉽게 이해되어지고 있었다.
김영호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공동체적 특성은 종교성과 연관이 된다고 말한다.
즉 우리 민족은 신앙을 중심으로 공동체생활을 해왔다는 점과
조선 후기 마을 공동체의 문화적 특성은 초창기 한국천주교회 신앙 교우촌이
존속(存續)하기 위한 바탕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교우촌의 형성
1) 대표적인 교우촌은 배티 일대의 교우촌을 꼽을 수 있다.
1830년부터 형성된 교우촌은 자연스럽게 촌락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들은 가정을 통해서 신앙 교육을 시키고 대를 이어 신앙을 증거한다.
교우촌 신자들에게는 기도와 신앙공부, 친교의 나눔이 제일차적인 과업이었다.
교우촌 공동체의 모습은 자율공동체, 성사공동체, 소공동체, 가족 공동체,
운명 공동체, 초대 교회적인 이상 공동체, 수행공동체,
비밀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초대 교우 공동체는 가족과 촌락 중심의 공동체, 수행을 위주로 하는
신앙인의 모습, ‘천주 신앙’에 기초한 친교와 사랑의 공동체,
참된 고향에 가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았다.
3 교우촌 삶의 모습
1) 초대교우촌의 삶의 모습은 신앙과 생활공동체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초대 공동체는 먼저 함께 기도하는 곳이었다.
선조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둘이나 셋이 모이면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습관을 드렸다. 기도는 자발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기도가 끝난 후 마을일 등 생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로 초대 공동체는 함께 공부하는 장소였다.
함께 모여 성서를 읽고, 교리를 공부할 필요에 의해
교회의 올바른 지식을 익혀서 삶의 현장에서 같이 나누게 되었다.
셋째로 초대 공동체는 함께 나누는 곳이었다.
선조들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함께 친교를 나누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교우촌의 삶의 모습과 연관해서 권혁주 주교는 신앙과 생활의 공동체로서
그 삶의 모습을 모델로 소공동체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3) 박해 시대에 교우촌 공동체 안에서 생기는 신자와 성직자의 친교는 인상깊다.
신자는 목숨을 걸고 신부를 영입하고 보호하며,
목자는 양떼를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다.
교우촌 문화의 맥은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의 와중에도 신앙촌을 형성하였고
그를 통해 대를 이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의 피를 흘렸으며
성직자들이 교우촌의 중심을 이루는 목자였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 촌락 공동체의 전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최양업 신부님으로 그분의 서한 을 살펴본다면
교우촌의 삶과 영성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교우촌 공동체는 좁게는 가정공동체, 나아가 기초구역공동체인
소공동체의 전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밥을 굶을지언정 가정 기도를 궐하지 않았던 열성이
소공동체 안에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교우촌 문화의 맥을 이음으로써, 초기 한국교회의 역동성이
소공동체 안에서 쇄신되고 새로운 복음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