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미사를 드리면서-♤
미사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예식이다.
그러나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 하여 이제 더 이상
빵이 아닌 것이 되고,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 하여
이제 더 이상 포도주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 해도 그 빵은 여전히 빵이며,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 해도 그 포도주는 여전히 포도주다.
미사는 마술이 아니다.
변하게 한다는 것은 빵에서 하느님(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빵을 빵으로만 보던 눈을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느끼게 하는 빵으로 대하게 하는 것이다.
빵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보이는 것’
이면에 감추어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보이는 인간을 대하면서 그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영을 보지 못하고 밉고 고운 정에 얽매여
인간을 대하는가 하면 그렇게 세상만사를 대할 때가 많다.
빵과 포도주를 보면서 우리는 그 안에 감추어 있는
빵과 포도주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빵을 대하며 그리스도인은 씨앗에서부터
빵이 되기까지의 빵의 온 역사를 대한다.
그리고 그 역사와 함께 한 자연과 인간의 마음을 대한다.
씨앗을 뿌린 농부에서부터 가루를 만들고 빵을 만들고
유통시킨 사람 등 제대에 놓이기까지 거쳐 온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억하고, 씨앗을 자라게 한
태고 적부터 불어온 바람과 비와 햇볕 등을 생각한다.
빵의 역사를 대한다는 것은 이렇게 온 우주의 역사를
천지 창조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대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빵을 우리는 주님께 바친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너그러이 받아주소서.
이렇게 해서 봉헌된 빵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빵은 이제 먹히기 위해 내 앞에 있다.
이 미사가 끝나면 이 빵은 사람들의 뱃속으로
녹아들어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 빵의 역사와 운명은 그대로 그리스도의 역사와 운명이다.
제대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를 기억
한다.
제대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의 운명에서 자신을 잡아
제물로 바친 사제 그리스도의 운명을 느낀다.
우리가 이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면
빵의 역사를 비롯해 그리스도의 온 일생을 먹는 것이다.
빵처럼, 그리스도처럼, 사라지기 위해서.
이런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 미사이다.
빵이 먹히어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있듯이
성체도 먹히어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있다.
그리스도인이 성체를 마음에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남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으로 내놓기 위해서이다.
자기의 몸을 성체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미사는 이런 희생제이다.
희생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는 예식이다.
그런데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이,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를 희생한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한다.
마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성체를 받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내 마음을 반성하는 것이다.
남을 위해 희생하기 싫어했던 마음을, 희생에 감사하지 못한 마음을,
모든 이(것) 안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했던 마음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한 눈과 귀를 열어 반성하는 것이다.
주님, 당신은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고 선포하셨지요?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당신을 보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들을 당신이 현존하는 존재로 보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내 존재로 당신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온 세상을 당신이 살아계신 집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내 기분에 따라 남을 이웃으로 만들었다가 원수로 만들었다가 합니다.
내 기분에 따라 세상을 찬송했다가 욕을 했다가 합니다.
그렇게 내 기분에 따라 오늘 당신을 찬양했다가 내일 당신을 떠나기도 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와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보지만 보지 못하는 제 눈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듣지만 듣지 못하는 제 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모든 게 제 탓입니다. 제 큰 탓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못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미사가 희생제이며 동시에 감사제라는 것은 감사송에 잘 표현되어 있다.
남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남이다.) 살리기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 또한 남을 살리기 위하여
내 몸을 희생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실 내가 지금 존재하는 것은 그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그 희생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분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해준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당신이 십자가의 희생이 되신 것을 감사한다.
이를 두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온 인류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감사하는 것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남에게 감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성체를 영하는 이유는 “주님, 우리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는 차원의 감사를 드리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도 당신처럼 내 몸을 남을 위하여 희생하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희생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게 하여 주십시오.
내 후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있게 한 나의 희생을 기억하며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마음을 발하기 위해서이다.
이리하여 사제는 빵을 들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외친다.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마셔라. 이는 내 피다.
너희와 모든 이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흘린 피다.”
이 몸을 먹고 이 피를 받아 마시기 위하여 이 몸처럼, 이 피처럼,
남에게 먹히기 위해 먹히는 것을 감사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한다.
그분도 감사를 드리시며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제는 빵을 먹기 위해 모인 신자들을 대신하여
온 교회를 대신하여 기도한다.
우선 봉사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한다.
이 또한 감사하기 위해서이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그들이 연옥의 고통을 면하고
천당 보내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다.
오히려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바친 삶과 기도와 희생을 생각한다.
내가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들이 오로지 그들의 삶만을 위해 살았다면,
그렇게 그들이 이기적으로만 살았다면, 나는 오늘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들이 오늘의 나를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한 것에 감사하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내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면서
나 또한 내 이웃을 위하여 내 후손을 위하여 그들이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기 위하여 나를 희생하기 위함이며
그렇게 희생하게 된 것에 감사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아니 내가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까지를 위하여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희생에 감사하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 부활을 함께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미사의 기도는 온 우주를 위하여 온 우주를 살리기 위하여
시공을 초월하여 바치는 기도이며, 여기에
내 한 몸을 바치게 초대하여 주신 것에 감사하는 기도이다.
이 얼마나 엄숙하고 위대한 성사인가?
그렇게 미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복하여 우주적으로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발하게 한다. 성사적으로 살게 한다.
그러므로 성체는 감사하는 마음 없이는 도대체가 마음에 모실 수 없다.
이 마음을 발하기 위해 우리는 영성체 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에는 용서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그리고 서로에게 평화를 빈다.
평화! 진정한 평화는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으로 내놓을 때만 가능하다.
성체를 영하기 직전 우리는 한 번 더 그리스도의 몸을 상기한다.
그 몸은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내놓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다.
어린 양을 부르며 어린 양으로 살지 못하는
이 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한다. 어린양만이 평화를 줄 수 있다.
성체를 받아 모시기 직전 사제는 신도들에게 성체를 보이며 외친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이 밀빵이 네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
어린 양이 보이느냐? 그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보이느냐?
밀빵의 역사가 보이느냐? 계속 자기를 죽이며 눈앞에 이른 밀빵,
씨앗이 죽고, 밀알이 죽고, 밀가루가 죽고, 반죽이 죽어 된 빵,
이제 다시 네 안어 죽어 없어지려는 빵.
이 빵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보이느냐?
이 빵을 먹는 자는 이 빵처럼 없어져야 한다.
네 입안에서 녹아 없어지는 그리스도를 음미하라.
그렇게 그리스도를 모시는 너도 남을 살리기 위해 그들 안에서 사라져야 한다.
너는 지금 사라지기 위해 죽기 위해 성체를 모시는 것이다.
이 사라짐에 이 죽임에 초대받은 자는 복이 있다. 복은 남을 위한 것이다.
이 성찬에 초대받은 너는 남을 복되게 하는 존재이다.
아멘.
- 이제민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