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친 아브라함
사람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꽃들도 저마다 향기를 풍기듯,
우리 인간들도 삶의 환경과 개성에 따라 향기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패기와 의욕이 왕성한 30대에는 자신의 욕심과 정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흔이 지나고 오십이 가까워질 무렵이 되면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세상일이 내 뜻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서서히 깨달으면서
지혜화 겸손을 터득하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나이 75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늦은 나이 이었지만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명할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창조하심은 물론,
축복을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실한 믿음을 통하여 많은 체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입으로는 수없이 고백하면서도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유혹과 위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쓰러지고 넘어 질수 밖에 없는가 봅니다.
아브라함도 막상 위기가 찾아왔을 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이집트 파라오에게 속이고 생명을 구걸하는 비굴함을
엿볼 수 있었으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잉태의 축복을 받고도
감사하기는커녕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는 의심과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쳤는데,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고정 관념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아버지하느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으며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일으켜 주셨고,
힘과 용기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길고도 짧은 25년 이라는 여정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훈련시켜서 100세에 아들 이사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늙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을 당신께 번제물로 바치라하시니
아브라함은 기가 막히다 못해서 하느님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준비하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야 땅으로 사흘을 꼬박 걸어가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만일 아브라함이 "나"였다면 어떻게 행하였을까...?
자아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순결한 믿음과 확신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위해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요구하셨고,
순종한 아브라함에게는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자손의 축복과 땅을 주셨으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올바로 영접할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주심에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양의 빛을 본 사람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에 연연하지 않듯
사소함에 얽매임 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하느님 보시기에 부끄럼 없는 신앙인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고개 숙여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7년 7월 7일
홍일표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