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양
복음(루카15,1-10)에서 잃은 양 한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경제원리에 따라 보면 너무나 비 소모적이며
언젠가부터 현대인들은 대(大)를 위해서는
소(小)가 희생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점철되어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허물도 개의치 않고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는
하느님 사랑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지요?
불신과 불확실성이 만연되어 서로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에
무거운 죄를 말 한마디로 용서받았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감당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총고백이라는 아름으로 용서받은 죄를
다시금 들추어내는 일도 그와 흡사함에서 비롯된 것이든지
아니라면 영적 교만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조건 없이 받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그 사랑의 원동력이 되어 실천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기도에만 머물 수 없으며
언제까지 묵주 알만 굴리며 성모님 앞에서 재롱을 떨 것인지요?
가끔은 믿음이 독실한 형제자매님으로부터 레지오마리애 입단한 지
10년, 20년이 되었다고 자랑을 들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물론 가지에 열매가 맺어 있듯 성모 신심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본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장 없는 믿음은 자칫 꼴불견이 되기 십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아기 때에는 엄마 품에서 재롱 피우는 것은
참으로 귀엽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20~30세가 되어서 까지도 유아기 때처럼
한결같이 재롱을 피우는 것은 그다지 아름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세속의 말 그대로 사람은 나잇값을 해야 하듯,
믿음 또한 세례를 언제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신심 단체든 물론 봉사 단체도 마찬가지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성모 신심에 지나치다 못해
기복신앙으로 향하는 신자들도 간혹 보게 됩니다.
이 모든 오류을 걷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가 적극적으로
재복음이 절실히 필요할 텐데 신자들의 무관심으로
믿음의 정체성마저도 흔들리지는 않을까
사뭇 염려가 들기도 합니다.
야고보 사도께서 말씀하심과 같이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야고2,24)
우리는 올바른 믿음으로 삶이 기도되어 이웃에게
그리스도 향기가 풍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굳건히 지키는 것은 성사와 기도가 되겠지만
믿음을 꽃피우게 하는 것은 실천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 성이냐시오는
"신앙은 시작이요, 사랑은 마침입니다."라고
그리스도의 삶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해성사 한 후 뉘우침에서 머물지만 말고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과의 화해는 물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일 것입니다.
2009년 11월 5일
참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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