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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치유의 기적

참평화방문요양센터 2008. 2. 15. 21:49

    ◐ 성경에 나타난 치유의 기적 ◐ 서울 가톨릭 의사회 2000년도 학술 심포지움 (2000년 5월 7일, 명동 가톨릭 회관) 백 운철 신부(가톨릭 신학대학교 교수)
들어가는 말 가톨릭 의사의 복음적 삶이라는 본 심포지움의 주제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성서가 주제로 삼고 있는 구원(salus)이라는 말은 인도 유럽언어에서 건강(sanitas)을 가리킨다. 구원이 천상의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되 이미 지상에서부터 영 육간의 건강을 포함한다면 육신 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는 인간 구원의 협력자인 셈이다. 의사의 이러한 막중한 사명에도 불구하고 정작 성서에서는 의사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사실 히브리인들은 히포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는 서양적인 의미의 의학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희랍인들이 병과 치유에 대해 국부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했다면 히브리인들은 이를 전체적이고 종교적으로 접근했다. 병의 원인과 치유는 그러기에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환경이라는 포괄적인 관계가 무너지고 되살려지는 전일적인 전망(holistic vision)안에서 이해되었다. 성서가 의사라는 직분을 독립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매우 드물다면 그것은 병의 치유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고찰되었기에 치유 역시 흔히 사제나 예언자의 활동과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치유의 기적을 구약과 신약성서 안에서 살펴보고 이를 기초로 결론에서 가톨릭 의사의 복음적 삶이 무엇인지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I. 기적의 개념 일찍이 괴테는 기적은 신앙의 귀염둥이라 말했으나 독일의 위대한 신약성서 학자였던 불트만은 근대 의학과 외과학의 발전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신약 성서의 기적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다. 물론 기적에 대한 이같이 부정적인 이해는 19세기의 결정주의적인 세계관에 의거하여 세상을 폐쇄적이고 기계론적으로 이해한 소이였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세상을 열려있는 실재로 이해하면서 인간 이해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비과학적이라고 거부하는 단순 판단을 더 이상 과학의 이름으로 강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일침을 가한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법칙을 폄하하고 미신적으로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 또한 옳지 못하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통하여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과 종교와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과학은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종교를 정화할 수 있고 종교는 우상숭배와 그릇된 자기 절대화에서 과학을 순화시킬 수 있다. 종교와 과학은 우리가 소명에 따라 되어야할 존재로 나아가기 위하여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다음에서 라투렐(R.Latourelle)은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에 그 초점을 맞추어 기적을 정의하고 있다. “ 기적은 능력과 사랑의 하느님께서 구원의 말씀의 세상에 지속적으로 현존하신다는 표지를 인간에게 보여주시고자 우주(인간과 우주) 질서 내에 당신의 특별하고 은혜로운 개입을 드러내는 종교적으로 경이로운 사건이다” 그러면 성서는 기적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서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기적이라는 뜻을 담아내고 있다. 하느님의 지고한 행위(히브리어로 geburot, 신명3,24), 놀라운 일(히브리어로 nifla'aot, 출애5,11; 시편71,17), 신기한 일(히브리어로 mofetim; 희랍어로 terata) 능력(희랍어로 단수 dynamis 복수 dynameis), 징표 (히브리어로 otot, 희랍어로 semeia 출애 7,3; 신명4,34)등이 그것이다. 흔히 서구 언어의 기적(miracle)은 라틴어 동사 mirari 즉 놀라워하다는 말에서 비롯하였다. 이처럼 기적은 무엇보다 경이로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기에 기적을 지칭하는 이 다양한 표현들은 모두 비와 같은 자연현상에도 적용될 뿐 아니라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신기한 일에도 사용된다. 세상을 경이로움으로 바라보았던 성서의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창조물 전체가 경탄의 대상이요 그런 의미로 모든 것이 기적일 수 있었다. 세상은 하느님 사랑의 성사적 표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신 가장 놀라운 일은 바로 출애급 사건과 시나이 사건에 집약되어 나타났다. 구약성서는 시나이 사건을 이스라엘의 민족 공동체의 새로운 창조로 소개하고 자연적인 창조가 역사적인 창조 즉 역사적인 구원으로 이어지는 기적적인 사건으로 전해준다. 기적적인 일이 구약성서에서 출애굽기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도 바로 기적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탁월한 역사적인 개입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간헐적으로 죽은 자가 소생하는 이야기(1열왕17)며 나아만의 치유(2열왕5)이야기, 그리고 여호수아가 태양의 순환을 잠시 멈추게 하였다는 이야기(여호10,12-13)가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역사와 우주의 주인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성서는 창조를 기적의 시작으로 보며 구원을 기적의 완성으로 보되 구약에서 출애굽 사건과 시나이 계약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적 구원의 시작이자 그 예형으로 이해하였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신약성서의 기적 이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에 집중되어있다. 기적을 이처럼 인간과 자연의 구원이라는 종합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병과 치유의 문제로 넘어가자. II. 성서에 나타난 병 성서에는 어떤 병들이 나타나는가? 몇 가지만을 대표적으로 열거해보자 1) 이스라엘이 시띰에 머물러 있을 때 백성들이 모압의 여인들과 놀아난 결과(민수25,9) 집단적 전염병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레위 15,2의 임질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 백성들이 메추라기 고기를 먹고 식중독에 걸렸다 3) 시몬의 장모 (마르1,31)가 걸린 열병은 북부 팔레스타인의 기후로 보아 아마도 말라리아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콜레라( 즈카14,12)가 있고 가축들이 집단으로 병에 걸려 죽은 일이 있는데 (출애9,3-6)이는 rift valley fever에 해당할 수 있다. 4) 헤롯이 벌레로 내장이 뚫려 죽었다는 것은 아마도 기생충에 의한 병일 것이다(사도12,23). 5) 불뱀 이야기( 민수 21,6-9)는 사람의 피부에 기생하는 메디나 충(guinea worm) 에 관한 것일 수 있다. 6) 피부병으로는 나병이 있는데 이는 피부병 전반에 대한 총칭으로 흔히 사용되었다. 욥의 피부병 (eczema universalis로 보인다), 모세의 손이 하얗게 되었다거나 미리암의 나병, 그리고 나아만의 나병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7) 신경계 질병으로는 중풍화자 (마르2,2-11; 루가5,18-26) 간질병(마르9,17-18, 그리고 옷을 벗고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던 사울의 경우 1사무19,23)등이 있었다. 8) 눈과 귀의 질병 (소경과 귀머거리) 9) 기형으로는 거인들 (민수 13,22; 13,28; 옥이라는 왕은 선단 비대증 신명3,11) 그밖에 절름발이 꼽추, 난장이, 옴쟁이, 눈에 백태 낀 자, 종기난 자, 고자, 다리, 팔이 부러진 자 ( 레위 21,18-20)등이 있었고 이들은 성소에 나오지 못하였으므로 사제가 될 수 없었다. 10) 이밖에 부마현상이 신약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III. 구약의 치유 1. 치유자로서의 하느님 모든 병은 하느님 이 치료하시거나 그의 대리인을 통해 치료하신다. 출애 15,26 은 “나는 야훼 나는 치유자이다.”라는 말씀이나 신명32,39의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부상을 입히기도 하고 치료해주기도 한다.”는 말씀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구약성서는 의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2역대16,12에서 이스라엘의 왕 아사가 병이 나자 하느님 대신 의사를 찾았다고 하여 비난을 받았다. 욥기13,4에서도 의사의 조언이 무용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치유의 중개인으로서의 예언자가 등장하는데 엘리야가 사렙타의 과부의 아들을 치유(1열왕17,17-23)하고 엘리사는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치유(2열왕5,1-14)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한편 의사에 대한 긍정적적인 평가는 희랍시대에 와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지혜서 37; 38,1. 4. 둥에서 처음으로 제시된다. 의사는 자연에 내재한 하느님의 법을 간파하고 치료에 사용하는 하느님의 도구이다. 2. 예방 의학적 접근 그러면 구약성서에는 오랫동안 의사의 활동이 왜 그처럼 과소평가되고 실제로 치유행위에 관한 보도가 거의 없는가? 첫째 구약은 히포크라테스적인 접근 방식과 달리 질병을 종교적인 배경에서 이해하였는데 이것은 당대의 정, 부정의 사고와 맞물려 있었다. 생명과 관련된 것은 정한 것이고 죽음과 관련된 것은 부정한 것이다. 시체는 부정의 대명사이고 그 반대로 하느님은 생명 그 자체로서 거룩함의 이상이다. 그러기에 레위11,45는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고 말한다. 둘째 이 거룩함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규정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예방 의학(예측)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었다. 성서는 전염성 및 위생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각종 피부병 환자를 격리시키고 시체를 만지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현대 의학적으로 보아도 죽은 자에게는 박테리아의 활동이 증가함으로서 시신을 만지는 것은 그만큼 해로웠기 때문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생리중인 여성에 대하여 일주일 간 접촉금지 및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하였는데 여성은 이 기간 중에 저항 능력이 약화되어 세균에 쉽게 감염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인이 아이를 출산하면 일정기간 부정하다고 선언되고 접촉이 금지된 것도 역시 예방 의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충분히 납득이 가는 규정이다. 부정한 음식으로 지적된 것은 돼지 등과 같이 되새김질 하지 않은 동물과 비늘이 없는 물고기들이었는데 이들은 제물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동물들이 부정하다하여 제물로 사용될 수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 기원에 있어서 위생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구약성서는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에 관한 언급은 없으나 질병이 도래하기 이전에 정, 부정의 종교적인 사고범주에 담긴 예방 의학적인 지혜를 통하여 발병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전일적 사고 이미 지적한 것처럼 성서는 질병을 전일적(全一的)인 차원에서 이해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단일체이기에 육신의 질병은 영혼의 문제와 깊이 관계된다. 온전한 몸과 마음이 창조의 본래 질서에 속한다면 병에는 도덕적 차원이 게재된다. 질병은 흔히 하느님의 벌로 이해되고 그 벌은 그 사람의 도덕적 행위와 관련되었다고 보았다. 병이 이처럼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해됨으로서 인간의 건강도 치료라는 의학적인 방법보다 보다 근원적으로 심신의 조화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였다. 한편 안식일 제도는 노동과 실적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오는 영 육간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탁월한 제도였다. 구약성서는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여 그 피를 먹지 못하게 하였고 안식일에는 가축들도 쉬게 하여 그들의 건강을 함께 보살피는 보편적인 생명 존중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4. 악의 세력과 병 기원 전 2세기 경에는 악의 세력이 병을 유발한다는 생각이 유다교에 유입되었다. 토빗트의 경우 참새 똥이 그의 눈에 들어가 실명하고 의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으나 악마를 �아내고 (토빗 6,7; 8,1-3) 물고기의 쓸개를 눈에 바름으로서 치유되었다.(11,8) 구약성서의 위경 작품과 신약성서에서는 악의 세력과 질병과의 상관관계가 더욱 강조되었다. III. 신약성서에서의 치유 신약성서에서는 의사의 존재를 언급하나(마르2,17) 그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루가 8,43은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여러 의사에게 보여주었으나 가산만 탕진하고 병이 낫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대신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치유행위가 부각되었다. 1. 예수와 기적 1) 예수 당대의 유대 종파의 기적 이해 엣세네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기적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특히 사두가이들은 기적이나 천사의 존재 및 부활을 믿지 않았다. 쿰란 문헌에서 악마 추방의 기도문(1QGenAp20,16-30)이 발견된 것 외에는 정의의 교사가 예언자라고 불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어떤 기적을 수행했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 예수 당대에 갈릴래아에는 카리스마적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 여럿 있었다. 하니나 벤 도사(Hanina ben Dosa)는 당대의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 아들을 원격 치유하였다. 그는 랍비 유다교의 창시자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의 아들도 치유해 주었다. 자카이의 아내는 남편에게 아들의 병을 치유해준 벤 도사가 더욱 위대한 것이 아니냐고 묻자 자카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는 종이고 나는 왕자이며 왕은 하느님이시다”(Berakot 34). 자카이의 답변은 인간의 모든 카리스마가 결국 토라(Torah)를 더욱 잘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수단일 뿐 이라는 바리사이들의 토라 중심주의(Torahcentrism)를 반영하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기적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는 기준을 신명 13,2-6에서 제시하였다. “예언자라는 사람이나 꿈으로 점친다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나타나 표적과 기적을 해 보인다고 장담하고 그 장담한 표적과 기적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너희가 일찍이 알지도 못하고 섬겨본 일도 없는 다른 신을 따르자고 하거든, 그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의 말을 듣지 말아라.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과연 너희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지 시험해보시려는 것이다. 너희의 하느님 야훼만 따르고 그 분만을 공경하여라. 그의 명령만 지키고 그의 말씀만 들어라. 그분만 섬기고 그에게만 충성을 바쳐라. 그런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그는 너희를 꾀어 너희로 하여금 에집트 땅에서 구출해주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등을 돌리게 하는 자이다.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해방시켜주신 이에게서 발길을 돌리게 하는 자이다. 너희는 이런 독소를 너희 가운데서 송두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 이 기준에 의거하여 바리사이들은 기적이 오직 기존의 계시를 돈독히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보았고 기적을 빌미로 새로운 종파 내지 파벌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마찬가지로 복음서도 이점을 경고하고 있다. (마르 13,21-22). 2) 예수의 치유 범위 바리사이들과 에세네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포함하여 기적을 중요시하지 않았음에 비해 복음서는 예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음을 보도한다. 그분은 베드로 장모 (마르 1,29-31), 가파르나움의 백부장의 하인 ( 루가 7,1-10// 마태 8,1-4), 중풍변자 (마르 2,1-12), 손이 오그라든 사람 (마르 3,1-6), 하혈하는 여인(마르 5,21-43), 두 소경 (마태 9,27-31), 귀머거리와 벙어리 (마르 7,31-37), 베싸이드의 소경( 8,22-26), 수종환자 (루가 14,1-6), 열명의 나환자 ( 루가17,11-19), 예리고의 소경( 마르 10,46-52), 마르쿠스의 귀 ( 루가 20,51-52) 베차타의 중풍환자 (요한 5,1-18) 태생 소경 (요한 9,1-41)을 치유하셨다. 그밖에 그분은 많은 구마 기적을 행하셨는데 (마르1,21-28; 5,1-20; 7,24-30) 부마현상과 병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 ( 루가 8,2) 벙어리 부마자 (마태 9,32-34), 소경 귀머거리 부마자( 마태 12,22-23;루가 11,14), 간질병에 걸린 부마자 어린이(마르 9,14-29),구부러진 여인(루가 13,10-17)의 경우는 모두 부마현상과 질병이 공존하였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것은 가파르나움의 중풍병자의 경우에서처럼 예수는 병을 치유하면서 죄의 용서를 선언하였다(마르2,1-12). 이처럼 죄가 병을 유발하고 악마가 그 배후의 세력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당대의 유다적인 사고안에서 예수는 마음과 육신의 치유자로 활동하셨다. 3) 예수 기적의 진정성 문제 이미 고대에서부터 기적을 순전히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사건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일종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1세기의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유다 고사기 II, 347-348)는 성서의 기적에 대하여 가급적 자연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지만 유명한 유다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대략 BC 19부터 AD 40년까지 생존)는 이를 하느님의 특별한 역사적 개입으로 이해하였다(모세의 생애 I,210). 한편 희랍의 플루타크는 그의 저서 “코리올란의 생애” 38 장에서 어느 성전의 나무 조각상에서 소리가 나는 현상을 나무의 재질이 기온의 변화에 따라 나는 소리라고 자연적인 해석을 가하면서도 신적인 개입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신중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과거 불트만식의 일방적인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예수 기적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예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기적을 어느 정도까지 수행하였는지 그 정도와 범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고 기적이 성서가 보도하는 그대로 발생하였다고 믿지도 않는다. 예컨대 뻬로 (C. Perrot)는 언어와 공동체의 이중적 매개를 기초로 기적이야기의 원형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즉 예수 기적의 본래적 역사성과 신앙공동체의 언어적 매개를 통한 이야기사이에 존재하는 그 긴장을 충분히 인정하여 기적의 사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역사 실증주의를 거부하고 또 한편으로 기적 이야기를 순수한 사건 보도라고 이해하는 근본주의적인 단견과도 거리를 취한다. 성서의 인간은 기적에서 어떤 표징을 보았으며 그 의미에 입각하여 기적을 재해석하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기적은 기본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다.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를 3부작으로 가장 방대하게 진행시키고 있는 마이어는 하느님나라의 표징으로서의 예수의 기적은 그만큼 역사적 진실성이 높다고 평가하고 예수의 신원을 위한 것 예컨대 현현( epiphany)의 기적은 대부분 부활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해석한다. 특기할 만 한 것은 마이어는 죽은 이를 살리는 두 기적이야기 (마르 5,35-43; 요한 11,1-16)를 근본에 있어서 역사성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예수의 어록 (루가 7,23)이 반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빵의 기적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 에피소드가 보리떡 스무개로 백명을 먹인 엘리야의 이야기(2열왕 4,42-44)에 기초하고 최후의 만찬( 마르 14,22-23)에 나오는 축복의 기도를 결합시킨 초대교회의 산물로 흔히 이해한다. 그러나 마이어는 이 두 전승 어디에도 없는 물고기의 존재로 보아 빵의 기적도 전적으로 창작된 것은 아니고 물고기가 곁들인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의 한 특별한 식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정이 이런 만큼 예수의 기적 중에서도 특히 치유의 기적은 고대 유다교 문헌과 희랍 문헌 등에서 그 유사한 사례들이 보도되고 있고 아울러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 안팎에서 기적적인 치유현상이 존재하기에 그 기본적인 역사성을 굳이 의심해야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4) 예수 기적의 종말론적 특징 다른 기적 수행자와 비교하여 두드러진 차이점은 예수는 자신의 기적에 종말론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예수 당대의 어느 기적 수행자도 기적적인 행위를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와 연계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치유 행위와 특히 구마 행위를 사탄과의 종말론적인 대결에서 승리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악마를 �아낼 때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거기에 왔습니다” (루가11,20)라고 선언하였다. 일반적으로 병도 악마적인 세력의 영향아래서 발생한다고 보는 당대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예수는 치유와 구마 행위를 통하여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보여주는 종말론적인 예언자였다. 그러나 기적은 그 자체로 예수의 신원을 밝혀주거나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확인시키는 명백한 증거는 아니었다. 예수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유다인들은 그가 베엘제불의 힘으로 악마를 �는다(루가11,18)고 비난하였다. 그러기에 기적에는 올바른 해석이 필요했다. 예수는 표징(semeion)을 구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아무런 표징도 없다”(마르 8,11)라고 말하거나 또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루가 11,29) 고 거부하였다. 이제 표징은 방관자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주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예수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신뢰와 다윗의 아들 솔로몬처럼 구마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의 권능에 신뢰가 표징을 얻기 위한 선결 조건임을 가르친다. 다시 한번 예수의 치유 기적은 전일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마르5,34; 10,52; 루가7,50; 17,11-19)는 말씀은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구원하다(soz)라는 동사는 육체적이고 영적인 구원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예수의 치유는 그 자체로 끝내지 않고 하느님 왕국의 도래에 대한 표징으로 그리고 보다 간접적으로 그가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표징으로 나타났다. 치유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완성될 몸과 마음의 새로운 창조의 선취이다. 끝으로 예수의 기적의 대상은 대부분 사회의 변두리 인생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구약에는 구마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가? 사울이 야훼의 나쁜 영에 의해 고통을 당할 때 다윗이 피리를 불면 사울은 안정을 찾고 나쁜 영이 물러갔다는 이야기가 1사무엘 17,23에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을 본격적인 구마 행위로 볼 수 있는지는 토론의 여지가 많다. 어쨌거나 구약성서는 왕조실록이 담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서로서 주로 왕과 종교 지도자들의 이야기이지 서민 대중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그리고 에세네등 당시의 주요 유다교 종파들의 기록에서 치유나 구마 이야기가 별로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경계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서민 대중과는 구별되는 당대의 엘리트들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유독 복음서안에 이런 이야기들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예수가 주로 만났던 사람들은 서민 대중이고 특히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가난하기에 배움이 적었고 무지하기에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지키지 못하여 죄인으로 낙인찍혔으며 사회적인 소외감이 그들로 하여금 쉽게 병들고 부마현상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치유가 갖는 의미를 인간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5) 치유 기적의 해석학 L.Eisenberg는 질환(disease)은 의학적 개념으로 신체의 기관에 나타난 비정상적인 기능 상태를 지칭하나 병(illness)은 그의 사회적 기능과 그 존재에서 느끼는 가치 하락과 소외의 경험이라고 지적하였다. 질환은 생물학적이고 의학적인 개념이나 병은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개념이다. 그리하여 질환은 치료하고 병은 치유한다 (curing a disesse and healing an illness)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치유자라고 할 때 그분의 치유는 어떤 개념일까? 그 분은 Eisenberg가 구분한 것처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서만 치유하신 것일까? 그러나 치유의 기적은 몸을 대상으로 한다. 성서는 몸(soma)을 육신과 마음의 전일적인 유기적 통합체로 이해하기 때문에 몸의 치유는 자연히 영 육간의 치유를 포괄한다. 심신 상관관계 (psychosomatic)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를 어느 한 측면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질환에 가까운 단어인 nosos(마태4,23; 루가9,1; 마르,34; 사도19,12)를 사용하기도 하고 병에 해당하는 astheneia(마태8,17; 요한5,5)내지 kakos exein(마태4,24)을 사용하면서 동사도 hiaomai(치료하다,루가 5,17; 6,9) therapeuo(마르3,10, 치유하다, 간호하다), sothesomai( 온전하게 하다, 회복시키다)등을 골고루 예수의 치유행위에 적용시키고 있다. 예수의 치유기적 특히 구마 기적은 인간의 심신상관의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 예컨대 게라사의 부마자를 치유한 이야기는 예수가 사회적 소외로 무덤에서 자해행위를 하며 살아가던 사람에게 접근하여 어떻게 그를 대인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고 사랑으로 그를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성서의 치유기적의 많은 부분은 심신상관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모세의 손이 나병 환자의 손처럼 하얗게 되었다가 가슴에 손을 넣으니까 다시금 정상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출 4,6-7)은 모세혈관이 외부 온도의 하강에 따라 급격히 수축하여 하얗게 되었던 소위 Raynaud의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미리암은 모세와 그의 에디오피아 부인을 흉보다가 지성소에서 신현을 보고 손이 나병환자처럼 하얗게 되었다(민수12,1-16)고 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신현에 충격을 받고 아드레날린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어 모세 혈관이 수축되어 창백해진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심신일여적(心身一如的) 해석으로 성서의 치유 기적을 자연현상으로 축소 환원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심신일여적인 해석을 통하여 성서적 의미로 치료 행위가 얼마나 전인적인가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의 치유기적은 단지 개인적인 몸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몸을 지향한다. 개인적인 몸들이 공동체적인 몸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적인 몸이 실현되는 탁월한 장소가 바로 식탁이다. 식탁은 사회의 지도로서 식탁 공동체성은 사회화의 지도 제작법으로서 가장 작은 단위인 소우주로서의 인간의 몸으로부터 사회라는 대우주를 향하고 있다 예수의 치유의 중요한 특징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병자를 치유하여 새로운 공동체에 편입시키는데 있었다. 나환자를 예로 들어보자. 히브리어로 saraat나 희랍어 lepra는 단지 오늘날의 나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광범위한 의미의 피부질환을 가리킨다. 1868년에 나병균을 퇴치할 수 있는 백신을 발견한 한센이 말하는 그 나병이 아닌 것이다. 신약성서 시대에 이 병은 elephas또는 elephantiasis였다. 그런데 넓은 의미의 나병에 걸리게 되면 그는 사회적으로 격리되었다. 나병환자에 대해서는 단지 피부뿐 아니라 그 옷 나아가 그가 사는 집의 벽에 이르기까지 경계의 대상이다(레위 13,45-46). 그는 단지 피부 질환자 이지만 그의 위험은 사회적 통합성과 안정성 그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들은 영예와 수치심이라는 고대 근동지방의 의식 구조 사회에서 죽은 자로 간주되고 사회로부터 버림 받는다. 물론 여기에는 예방 의학적인 배려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환자는 공동체의 경계 밖으로 퇴출되어 사회적인 죽음을 그 댓가로 치루어야 했다. 이 점은 오늘날 에이즈 환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소위 경계의 문제이다. 예수의 치유 기적이 지향하는 사회적 통합성은 환자를 치유할 뿐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에 편입시켜 그에게 사회적인 삶을 다시금 보장해주었다. 이처럼 치유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현실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병으로부터 온전해진 사람의 몸이 공동체의 몸으로 합하여지는 식탁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2. 초대 교회와 치유의 기적 예수의 치유 기적은 하느님 나라 선포와 그 실천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께 파견 받은 자로서 스승의 모범에 따라 병든 이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였다(루가10,9). 바울로의 말에 의하면 사도로서의 자격은 기적들과 능력에 찬 행위들(2고린12,11-12)로 입증되어야 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로에 이르기까지 신약성서의 광범위한 전승들이 사도들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특히 팔레스타인 유다인 공동체에서는 복음 선포가 치유 행위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처럼 중요하게 생각된 것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도 표징들과 이적들의 위력(로마15,19; 2고린12,12)을 하느님께 받았음을 자랑으로 삼았지만 진정한 능력(dynamis)이란 바로 십자가의 약함과 예수의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 외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도는 “유다인들은 표징(semeia)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고린1,22-23)라고 선언하였다. 한편 마르꼬는 지상에서 죄의 용서와 치유의 기적 등 놀라운 권한을 가진 인자가 죽음에 이르러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마르코 특유의 주제에 담아 묘사하였다. 그리하여 신약성서는 기적이 자칫 미신적인 측면에서 이해될 가능성을 염려하여 믿음과 밀착시키고 가장 경이로운 기적을 예수의 부활에서 찾았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몸이야말로 치유의 완전한 현실이며 구원의 실재였던 것이다. 인도 유럽언어에서 구원이 본시 건강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 할 때 완전한 건강 즉 구원은 부활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부활하신 몸이 구원의 완전한 현실로 이해하였을 뿐 아니라 그 분의 몸을 교회론적으로 해석하였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하나하나가 그 지체들이다(1고린12,27). 신자들은 이미 지상에서 그분의 몸의 지체로서 부활하신 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이 현실 이상으로 더 큰 기적을 구할 수 없었다. 사실 바울로 자신도 몸에 가시를 지니고 (2고린 12,7)살면서 이를 주님께 세 번이나 멀리 해주십사고 간구하였으나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2고린 12,7-9)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고 있다. 그 능력은 허약함 가운데서 완성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세례를 통해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한 지체를 이루고 그분의 재림 때 그분과 영원히 결합할 것을 고대하는 종말론적인 희망 안에서 지상적인 차원의 치유를 궁극적인 구원에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통합할 줄 알았다.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이 성서에 나타난 치유의 기적을 살펴본 다음에 본 심포지움의 주제인 가톨릭 의사의 복음적 삶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 성서는 심신 일체의 전일적 사고 안에서 치유 행위를 이해하고 치유를 보다 큰 가치인 하느님의 나라 내지 그리스도의 몸에로 통합되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오늘날 고도로 분업화, 전문화된 의학계의 현실에서 의사가 이러한 전일적이고 통합적 사유를 가지고 치료에 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사도들이 복음 선포의 한 요소로 병을 치유했다면 가톨릭 의사에게 있어서 그의 치유 행위는 단지 육신의 치료뿐 아니라 인간 구원의 현실에 참여하는 복음 선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비록 언어적 복음 선포는 아니더라도 가톨릭 의사는 환자의 치유를 통해 인간의 구원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의학계에서 하는 표현대로 “의사가 병자에게 붕대를 매어주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시는 것이다.” 여기에 기적적인 치유가 목표는 아니다. 성서도 이를 그 자체로 강조하지 않았다. 병자는 치유를 통해 육신의 건강뿐 아니라 생명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도록 치유를 인격적인 만남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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