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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통
왜 하느님께서는 선하시면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
그리스도교 십자가의 논리에서 볼 때 인간은 결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 십자가야말로 온갖 고통에 스며들어
있는 곳이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고통 속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1. 고통의 의미
1) 성숙한 인간으로 발전
고통은 우리 인간이 성숙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와주고,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성숙과 지혜로 자신의 삶을 빛나게 하고, 타인으로부터도 존경과 신뢰를 받고
온유한 인간이 된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과 고통을 모르고 자라는 사람들이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통이나 번민 등 인간의 모든 갈등 요인들을 무조건 없애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세계는 비인간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계시는가?'하는 것이다.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다. 너무도 대조적이다.
2)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부여
고통은 인간의 현실이며 인간은 이런 고통 중에서 태어나고 사실상 우리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큰 일들은 대개 고통 중에서 생겨난다. 고통 중에서 많은
의미있는 일이 일어난다. 나아가 고통을 모르는 인간은 성숙되고 깊은 사랑을
체험하기 힘들다. 그런 면으로 볼 때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고통의 한 단면이다.
즉 모든 고통이 무조건 없어져야 할 것도 아니며 무의미한 것이지도 않다.
3) 무의미한 고통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을 성숙시키고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예외도 많다.
이 세상에는 무의미한 고통도 많다. 인간을 선으로 이끌고 성숙케 하는 고통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고통도 있다. 이런 고통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줄곧 있어 왔으며 고통의 이중적인 면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고통도 그것을
극복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다가오게 된다. 누군가는
'인간의 역사는 고통의 경륜이다'라고 하였다.
2. 고통의 극복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원하지, 죽음을 원하지 않으신다.
또한 인간은 고통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고통을 극복하거나 제거하고자 한다.
고통 중에 구원을 체험했다는 것은 어떤 면으로 고통을 극복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의 극복 역시 고통 안에서 가능한 것으로,
고통을 옆으로 제쳐놓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십자가를 통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고통과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는 모든 시간적인 것,
불완전한 것을 제거해야만 신성이 남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분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말아야 하고 고통과는 무관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신상은 그런 완전성, 불완전성,
무감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예수님께서 태어나 살았다가 죽고, 또
인간이 살고 고통을 받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드러나며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죽음이 하느님의 뜻이며, 이것이 예수님의 삶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통해 나타나듯이 처음부터 인간의 역사와 삶에
개입을 하시고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죽은 것이 그대로 그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 왔다는 것,
하느님도 우리의 고통을 당한다는 것, 하느님과의 고통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우리는 구원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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