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요청하는 인간, 아울러 구원에 초대된 인간
1.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인간은 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기독교 신자이건 불교 신자이건
아직도 많은 한국인이 점쟁이를 찾거나 무당을 찾는다.
그들은, 종교학에서 소위 고등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종교 예식에
참여하면서도 구복 자세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기술 문명이 가장 발달되어서 그 혜택을 많이 누리는 지역과
그 혜택에서 제외된 지역의 사람들이 심화되는 빈부의 양극화로써
분리가 고착되고 있다.
얼마전까지 이념 대립으로 몸살을 앓던 세계는 이제 신자유주의 체제로
온 세상이 편입된 가운데 매우 빠르게 생활 양식이 변화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극도로 인생을 고통스러워하고 자살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날 정도가 되었다.
또한 인간은 천재지변을 당하고 전쟁, 병고 등에 시달리면서
극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열렬히 복을 추구한다.
신화, 기도, 노래, 정치 프로그램들에 표현되어 있는 구원은 상상력으로써
인공의 낙원을 꿈꾸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인간이 결핍, 불안 속에
살아가며 끊임없는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데 정치, 경제, 법, 군사등이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지만 자주 인간은 그런 것들에 의해서 자유를 잃고
위협 받고 고통당하며 소외되기도 한다.
또 굶주림, 전염병, 대홍수나 대지진, 전쟁, 경제적 대위기 등은
세상이 끝장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폭력으로 드러난다.
이와같이 인간을 둘러싼 일련의 비극적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구출되고 공포를 야기시키는 것들이 멈추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복, 기쁨, 평온함과 충만함을 누리게 되는 것을 구원 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은 끊임없이 이 구원을 추구한다.
2. 인간에게 고통을 야기시키는 것들
인간에게 불행, 재앙, 고통, 악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모습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보도록 한다.
1)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분열
▷죽음:죽음은 인간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외시키는
가장 큰 고통거리이며 수수께끼이다.
▷병:죽음의 예고편과 같은 병은 살아있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가하며 위협한다.
▷노동:노동의 복음을 말하지만 구약 성서에서도 노동을 죄의 대가로
이해하며(창세 3,19)역사적으로 종, 노예, 노동자 계급이
괴로워하고 착취당하면서 노동해왔고,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만 당장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워하며
가능한 한 회피하고자 한다.
▷ 환경 파괴:산업 혁명 이후 기계 문명과 자원 활용으로 인류가 물질적
안락을 많이 누리지만 동시에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핵과 공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 천재지변:대지진, 가뭄, 홍수 등이 기술 문명 발달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다 준다.
2)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열
★가족
가정은 인간의 결합, 출생, 성장이 이뤄지는 행복의 보금자리이지만
인간이 심리적인 상처를 심하게 받는 곳이기도 하고,
가족 사이에 대화의 벽을 크게 느끼기도 하는 곳이며
이혼의 불행을 겪는 곳이기도 하다.
가정에서 부부는 성 생활의 만족을 맛보기도 하지만 성의 소외를
겪기도 하며, 가정은 남녀의 차이로 말미암은 보완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성의 차별이 강하게 이뤄지기도 하는 곳이다.
★경제적, 사회적 체제
인간은 경제적 분배 정의 실현 문제 앞에서 희망과 보람을 맛보기도 하고
착취당하며 패배감을 맛보며 집단적인 비참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산업화로 말미암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도 분배 정의의 실현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채
미국의 강제적인 영향 속에서 민족 고유의 자주적인 사회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세계 경제 시장에서 일본의 뛰어난 경제력은 한국 사회로 하여금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외적인 경제력만을
모방하려는 자세를 유지하도록 유혹하고 있으며,
동구라파 공산주의 체제의 와해는 미국, 일본의 극단적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선전되어서 보다 인간적이고 복음적인 사회,
경제 체제를 건설할 시도마저 포기하도록 하는 분위기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최대로 발달된 경제적 혜택을 누리면서 소비 사회로만
전락되어 인간을 욕망의 포로로 만들어 가는 위험을 많이 안고 있다.
한국 사회는 세계적인 양극화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서구의 소비 사회 구조를 급속하게 본받음으로써
사회의 범죄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태로 향하게 되었다.
★정치
현대 세계가 정치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고 좋은 결실을 거두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서 필요한 정치,
특히 권력 투쟁 과정에서 아직도 전제 정치, 패권주의, 대량 학살의 전쟁,
인종주의, 식민지, 집단 학살, 고문, 집단 수용소, 정치범에 대한 보복 등
심각한 문제들을 대량 단위로 심각하게 드러내고 있다.
3) 인간 자신 안에서의 분열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싶어하지만 그 자유로움에 내재해 있는 무질서를
제대로 조절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한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 7,15.18-19에서 명쾌한 필치로 모든 인간이
고통스러워하는 자신 안에서의 분열을 표현했다.
인간은 과거에 자신이 잘못을 범한 데서 오는 죄의식으로 하여금
현재에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허용하고 마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 원인이 사회적 문제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자살,알콜과 약물 중독
현상 등은 개인적 차원의 분열이 심각하게 파괴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4) 절대자에게서 분리됨
인간은 결핍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발명하고 발견하고
생활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실존적 공허함을 아프게 체험하면서
의미를 찾고 구원을 갈구하고 있다.
인간은 절대자가 아닌 피조물이면서 절대적 존재가 되기를 지향하고 있다.
위대하고도 비참한 존재인 인간,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존재인 인간은 고통과 악을 겪으면서 자신의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발전시키며,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잘못을 저지르면서
궁극적인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3.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한계와 그곳에서 발견하는 선사된 구원
1) 구원을 찾는 인간의 조건과 허구적 구원.
인간은 귀중한 자유를 누리기를 소망하며 행복과 충만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비관론자들은 이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꿈일 뿐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낙관론자들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구원을 약속하는 것들은 인간이 갈망하는 그 행복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렇지만 인간 실존의 참된 조건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인간의
상상이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도피시키려 함으로써
구원이 이뤄진다고 약속하는 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 실존의 차원들을 보면,
시간 속에서 산다.
관계들의 불확정 속에서 산다.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즉, 욕망과 현실, 육체와 생각, 시간과 영원, 자유에의 갈망과 고뇌
등은 삶에 가져다 주는 긴장을 잘 드러내준다.
인간 실존의 유한성 앞에서 인간은 욕구 불만을 느낀다.
즉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원하던 삶이 아니고 기대하던 바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지만 그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욕구 불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유한한 이 세상 삶을 감옥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런 인생의 쓰라린 체험은 구원과 관련해서 두 가지 방향의 잘못된
해결책을 손쉽게 찾게 된다.
하나는, 어떤 구원도 불가능한 것이고 인생은 비극적이기에 지혜롭게
인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보다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신앙인이 솔깃해하는
것으로서 세상은 비극적이기에 다른 세상을 얻어야 한다고 하며 현실을
도피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2) 바람직한 구원관
인간이 욕구 불만을 느끼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삶이 낯설고 극복할
수 없는 유한성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보다 자유롭고,
보다 인간답게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유한성에서 자유롭고자 하기 보다는 인간화하는 것을 방해하는 소외의
유한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더 이상 도피가 아니다. 인간의 유한성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위한 참된 자유의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구원은
인간의 유한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면서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은 삶의 여정에서 실제로 가능한 것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즉 포기된 무기력의 유한성에서 구출하는 것이고, 이 세상을 인간화시키기
위해서 그 유한성을 다시 신뢰하는 것이다.
구원된다는 것은 충만한 삶, 항상 산다는 것(영원한 생명)이다.
자유와 사랑으로 사는 충만한 삶은 가장 깊은 욕구를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고, 여기에 인간이 찾는 복이 종합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구원은 자기 삶이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자기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과 불가피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고유한 자유를 통해서 구원을 성취하려함에 있어서
불가능함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구원의 새로운 소식을 기다린다.
충만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구원에 대한 욕망은 불가피하게
현재 우리의 실존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지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구원을 갈망하는
것에 반해서 인생은 죽음을 도무지 피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살아있기를 바라지만 자기 자신을 주위로부터 송두리째
빼앗기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 실존에게 구원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오늘 그 구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그것이다.
3) 인간에게 선사되는 구원
구원의 충만한 실현은 하느님과 관련된 인간의 초월성 안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의 선물, 하느님 안에서 부활된 삶의 선물이다.
만약 인간의 지상 생애가 결정적이고 절대적 삶의 형태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인생은 실패하는 것이고 무의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