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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회사

참평화방문요양센터 2008. 8. 6. 20:15

조선 천주교회사 조선에 천주교회가 들어오게 되는 세계사적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면, 당시의 세계 교회의 상황은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세계로 향한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도미니꼬회, 프란치스코회, 예수회 등의 수도회가 창설되어 선교사명을 펴 나가고 있었으며, 이웃 중국과 일본에도 이미 천주교가 전래되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을 통해 조선에 천주교 전파를 시도하지만 별 진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은 이 때 당시 주자학을 건국 이념으로 하는 유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큰 나라로 받들면서 일 년에 몇 차례씩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부연사행이라 하는데 이를 통해 중국 문물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1) 천주교의 전래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조선 후기인데 이 때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당쟁으로 인하여 정치 질서가 문란해진 시대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농민이 점점 많아지는 세금 수탈로 인하여 노비로 전락하는 예가 많았고, 상업이 발달하여 어려워진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찾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양반과 상민이란 계급에서 양반, 중인, 상민, 노비의 네 신분으로 세분화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양반이 전체 인구의 40-50%에 달하였습니다. 이처럼 천주교가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조선 후기는 국가의 지배체제와 통치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던 때였고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만 껍데기의 학문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속세에 묻혀 살던 학자들은 허(虛)의 학문이 된 성리학적 유래에 대하여 실(實)의 학문을 찾게 됩니다. 이것을 실학운동이라고 합니다. 이 실학운동이란 실생활에 기여할 수 있는 학문을 말합니다.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고심하며 중국의 사신을 통해 들어온 책들을 연구하던 중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상제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우주만물이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지속하는가? 그리고 이런 세상의 모든 질서를 주관하는 분은 누구인가? 라는 의문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런 문제들을 연구하다 보니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실의 칠극 등의 책에서 그 해답을 얻게 됩니다. 이 책은 중국에 전래된 천주교를 중국 글로 정리한 것으로서 그들은 이를 통해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인간의 삶에 있어 참 진리라 생각하여 학문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신앙 실천 운동으로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1) 신앙공동체의 탄생과 첫 탄압 그러나 신앙 실천운동을 전개하다 보니, 교리 서적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벽은 동지사(부연사행 중 하나)편으로 북경으로 파견되는 그의 친구 이승훈에게 북경 천주당에 가서 성직자를 만나고, 교리서적을 얻어 올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이승훈은 북경 천주교회에 찾아가 그곳 신부와 대화하며 이를 상의하던 중 스스로 세례 받기를 청하여 천주교 신자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교리서적과 성물을 가지고 1784년 봄에 귀국합니다. 그리고 이벽과 합심하여 전교하고 세례를 줌으로써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초기에 세례 받은 신자들로는 권철신 권일신 두 형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처음 모임을 가진 곳이 지금의 명동 성당 자리인 중인 계급의 교우 김범우의 집인데 이를 명례방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지곤 했었는데, 1785년 형조 관리들이 순찰을 돌던 중 우연히 발견되어 양반 계급 모두는 훈방 조치되고 중인이었던 김범우는 고문을 당하고 귀양 가서 바로 그 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라 합니다) (2)가성직 제도에 의한 자치적 조선 교회 성직자가 없었던 초대 조선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활성화하기 위하여 임으로 성직계급을 정하고 성무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를 가성직 제도라 하는데, 그들이 교리를 연구하다 보니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북경 성직자들에게 편지로 문의하여 확인한 그 답으로 시행해 오던 가성직 제도를 폐지할 것과 조상제사를 금한다는 답서를 받게 됩니다. 이에 그들은 하던 모든 성무 활동을 중단하고 이때부터 중국에 진짜 성직자를 파견해 달라고 청하기 시작합니다. (3)외국인 신부의 입국과 활동 조선 교우들의 성직자 요청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파견됩니다. 그는 명도회라는 평신도 단체를 조직하여 교리를 익히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신자들이 입국당시 4,000명에서 배인 10,0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후 정부로부터 박해를 당하여 첫 성직자를 잃게 되고 그 후속으로 파견되는 외국인 신부들은 많은 활동을 하게 되지만 시국을 위태롭게 하고 사악한 종교를 퍼트려 민심을 흉흉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잡혀 많은 이들이 순교하게 됩니다. 이는 당시 정권을 쥐기 위해 각 파간에 당파 싸움이 그치질 않았고 천주교인에게 우호적인 파가 정권을 잡으면 조용했고, 그러다 반대파가 정권을 잡으면 천주교는 박해로 희생되어 가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 소년 3명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방인 사제를 양성하기도 하고 또 어려운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잠시도 쉬지 않고 열정을 불태웁니다. 그리하여 모진 박해 속에서도 산 속으로 피해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결과 1886년 드디어 종교의 자유를 얻기에 이릅니다. 2)박해의 역사적 배경과 주요 원인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조선 교회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그 박해의 결과로 얻어진 것들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초대교회가 유대교 전통과 충돌하면서, 그리고 지중해 연안의 전통과 문화와 충돌하면서 박해를 당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신앙의 자유를 얻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천주교라는 생소한 종교는 조선의 전통과 충돌하고 또 당시의 시대적 혼란으로 인해 잘 수용되지 못하고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은 당시의 정치적 혼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교의 전통에 위배되는 사항들 즉 조상제사거부, 가족과 관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먼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각 파벌간의 정치적 갈등이 많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영 호남의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남인파(시파)와 북인파(벽파), 그리고 노론 소론 등 각 파벌이 형성되었고 왕이 바뀔 때마다 왕이 비호하는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자기 반대파들을 모함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를 사색당파 싸움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이들의 싸움에 정치적 희생물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은 당시 조선의 중심사상이었던 유교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평등사상과의 충돌입니다. 유교사상은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엄격히 계급을 구분하여 주종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리스도교는 양반 상민 천민 할 것 없이 모두 평등하게 생활해 나갈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공경은 유교의 효도관과 상충되어 부모보다 하느님 동경을 먼저 생각함으로 충돌을 빚고, 한편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당시의 관념에 비해 천주교는 남녀 모두 동등한 인격체로 보아 남편과 아내가 주종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를 주장하였으며, 과부의 재혼도 허락할 뿐 아니라 여자가 강제로 결혼 당하는 것을 반대하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천주교의 평등관은 당시의 사회 위계질서를 혼란에 빠트리고 파괴시키는 요소로 간주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 다음으로는 조상의 제사문제인데, 이 문제는 한국 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서도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유교의 인(仁)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교는 효를 통해 인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효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파악했고 따라서 효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교의 효의 정신은 가장 귀중한 생명과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조건 없이 주신 생명의 근원인 부모와 선조께 감사를 드리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부모도 생시와 똑같은 방법으로 공경함(제사)으로써 그 효를 다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인들은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이 효를 거슬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천주교인은 사람도 아니요, 파렴치한 짐승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결 과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조선교회는 그 출발부터 정부와 국민들에게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무려 100여 년간에 걸친 모진 박해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교의 전통에 있어 부모와 조상에 대해 예를 다함은 좋지만 혼을 모시는 신주(지방, 위폐 등)을 모시고 그것에 감사하고 복을 기원한다는 것은 천주교에 있어서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일인지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정부로서는 사회질서에 위기와 혼란을 초래하고 국가를 반하는 요소로 인식되었기에 박해를 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녀, 양반과 상민이 위계질서 안에 서로 뭉쳐 살아감은 좋지만 만민이 남녀 또 양반, 상민 할 것 없이 평등하다는 것은 기정의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진 박해에도 하느님의 진리를 지키고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그 순교를 체험한 당시의 의식 있는 학자들이나 관리,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고 삶의 참 진리라 인식되었기에 순교를 하면 할수록 더욱 신앙인이 불어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들의 죽음은 신앙적 행위였을 뿐 아니라 사회체제에 대해서 사상통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역사적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모진 박해를 이기고 신앙의 자유를 얻는 승리의 결과를 가져올 서 있었던 것입니다. 4)조선 말기와 일제시대의 교회상 조선말기에 들어 조선은 쇄국정책을 풀고 불란서와 한불조약을 체결되면서 외국인 성직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자유로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본당이 설립되고 공소(성당보다는 규모가 작고, 또한 성직자가 없는 곳) 조직이 이루어지면서 한국 교회는 활기를 띠었습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원산 부흥 골에 있던 신학교를 용산으로 옮기고, 1888년에는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고아, 병자, 노인들에게 구제사업을 벌렸다. 수녀회의 사업은 한국에서의 최초의 사회 사업이었다. 1898년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교우들이 모임을 가졌던 명례방 김범우의 집터에 명동성당이 완공 축성되었다. 이 후 각종 잡지가 발간되고 학교가 건립되어 복음전파 뿐 아니라 조선에 근대화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이 막을 내리고 일제에 의해 지배를 당하게 되자 학교가 일부 폐교되고 언론을 통제 당하는 등 다소의 박해를 받기도 하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애국 계몽운동을 해 나감으로써 대응하게 됩니다. 그 예를 보면 안중근 의사, 독립 단체를 조직한 이기당, 3.1운동 당시 서울의 '예수 성심학교'와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학생들 중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퇴학 당하고 서품이 보류된 신학생들, 만주의 천주교 신자단체가 주축이 되어 활동한 '의민단' 등은 교회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사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5)현대의 한국교회 조선에 한국 천주교회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작한 인권 회복 운동, 개화 운동, 근대화 운동 등을 통한 복음화의 정신은 역사를 거듭하면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1960년대부터 활발한 경제 개발 원조, 1970년대의 가톨릭 농민회 운동, 부산교구의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주택 분양(800 가구), 무엇보다도 큰 영향을 끼친 '신용협동조합운동'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370여개 소에 이르는 사회 복지 기관들(1989년 통계) 등은 우리 민족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한편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도 들 수 있습니다. 정부가 설립되면서부터 자행된 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이 나라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 예를 보면 1979년 농민탄압을 위한 조작 사건인 오원춘 사건 80년대의 민주 헌법 쟁취 노력, 학원 안정법 시행 반대 운동,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 민주화를 위한 기도 운동 등을 통하여 1987년 6,29선언을 유도해 내는데 한 몫을 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어디를 찾아보아도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 외국 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교회를 세우게 되었던 것은 결코 기적적인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의 설립은 진리를 향한 열정 속에서 자치적으로 생겨났고, 신도들은 교회를 지키고 확장시키는데 있어서도 열정적으로 나섰으며,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열렬한 신앙 운동을 폈기에 이룩할 수 있었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들은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 있어서 개인의 양심과 인격, 그리고 그 존엄성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신앙은 이 땅에 평등 사상을 새롭게 심어 사회적 불평등을 배격하였고 박해의 혼란기에는 인간 양심의 중요성을 교육하였습니다. 또한 일제하에서 교회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삶을 불태운 애국지사들과 많은 신도들도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 교회는 사회개발과 복지 그리고 정의 사회구현을 위해 노력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과 역사적 결과를 유산으로 안고 있는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안에서 이와 같은 노력들을 계속해야 할 사명과 민족의 복음화 사명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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