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쁨 감사 영광

종말론적 희망 / 송용민 신부

참평화방문요양센터 2008. 5. 16. 16:03

    종말론적 희망 / 송용민 신부 인간은 누구나 삶의 끝을 바라볼 줄 안다. 그것이 내 주변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죽음을 통해서든 내가 직접 겪었던 아찔했던 순간을 통해서든 인생의 끝에 대한 체험은 언제나 내 곁에 존재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마지막 단어를 인생의 페이지에서 가능하면 지워버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의학의 발전과 생명 공학의 진보는 미래의 장밋빛 청사진을 제공하고 무병장수의 꿈을 키워주고 있다. 실제로 장기 이식과 생명 복제를 통해서, 더 나아가서 인간의 기억을 통째로 뽑아 다른 두뇌에 이식하는 기발한 착상까지 나올 정도로 인간 생명의 연장에 대한 욕구는 가히 상상을 뛰어 넘는다. 그러나 고도의 물질문명이 발달될수록, 인간의 생명에 대한 욕구가 커질수록 죽음의 그림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매일 전해지는 대중매체들을 통한 사건사고 소식들과 애써 외면해 보려 하지만 내 주변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위협들을 직감하는 순간 자신이 살아 있음에 대한 불확실성과 미래에 대한 공포를 절감하기 마련이다. 과연 인간은 죽음이란 단어를 피하고 살 수 있을까? 모든 인류의 종교들은 한결같이 죽음이란 실존적 마지막 질문에 대한 인간들의 응답의 역사를 보여준다. 매순간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미래를 향해 자신의 삶을 기획하는 과정 속에서 결국에는 만나게 될 자신의 죽음에 체험은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릴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불교는 죽음을 대자연 속에서 억겁의 세월을 반복하게 하는 인연과 윤회라는 신비 속에서 텅빈 허상으로 치부하고, 인간은 단지 이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최종적 목표로 제시해준다. 유교와 무교는 명시적인 내세관을 내세우기 보다는 현세적 삶의 중요성 속에서 죽음이 조상신과의 유대관계를 통한 이승의 삶으로 연속된다고 믿거나 아예 이승과는 다른 저승에서의 삶에로의 ‘넘어감’으로 이해하려 한다. 몇몇 신흥종교들은 이 세상은 헛되고 스쳐지나갈 삶이니 아예 세상을 등지고 절대신과 그 신을 인간과 통교 맺도록 이끌어줄 현세의 구원자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통해서 죽음의 피안으로 도피하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종말을 희망하고 있는가? 전통적인 가르침대로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보다는 천국에 대한 궁극적 희망을 안고,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세상의 악과 불의와 맞서서 가장 순결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요청받는다. 순례의 여정 속에 세상은 악으로 물들어 있으니 고통과 불의를 참고 이겨내는 것이 내세의 구원에 가장 훌륭한 준비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개신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선포한다. 그들에게는 은총의 성사나 신자로서의 구체적인 책임과 의무에 대한 교회의 간섭도 별로 없다. 모두가 하느님과 직접 통교의 관계 속에서 교회는 단지 개인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성서에 나온 말씀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논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천국의 삶은 믿음의 복종을 드러내는 몇몇 선택된 이들에게 예약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교파도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소개하는 ‘파수꾼’의 앞표지 그림처럼 꽃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그래서 세상에서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한 천국을 향해 사는 장밋빛 희망을 이야기하는 교파도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기대하는 종말은 이런 것일까? 우리가 믿고 살아가며 희망하는 그리스도 신앙은 죽음이라는 사건은 이렇듯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기 위해 잠시 스쳐지나갈 관문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현실에서 겪고 있는 죽음의 세력과 의미에 대해 너무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신앙인들로 하여금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삶의 단순한 미화로 포장하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얼마 전 종영된 ‘장밋빛 인생’이란 드라마의 주인공 맹순이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처절한 몸부림을 보이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남편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메시지를 남긴다. 몇몇 한류의 주역인 드라마들을 통해서도 죽음은 고통스럽지만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마지막임을 많은 사람들의 눈물 속에서 보여준다. 누구나 그렇듯이 죽음을 준비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분노하며 죽음을 거부했던 사람도 마지막 순간에는 세상에서 살면서 뒤늦게 깨달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한없는 후회와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가족과 형제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사람들은 죽음이 단절을 의미하는 고통이지만, 인생을 완성하는 가장 숭고한 순간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모두는 죽음에 대한 단순한 공포를 넘어 죽음을 뛰어 넘는 또 다른 희망에 대한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일면들이다. 교회의 성인들과 순교자들 역시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죽음마저도 극복하게 한 희망의 정체가 바로 하느님의 약속과 신뢰 안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말은 죽음에 대한 회피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과 가장 깊은 일치 속에 있음을 깨달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통의 두려움을 모르지 않았다. 그분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죽음이 거두어질 수 있는 잔이라면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고, 죽음을 향해 골고타 언덕까지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가장 깊이 체험했다. 죽음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겪지 않아도 되는 피상적인 통과의례가 아니라 철저히 몸으로 부딪혀 겪어내야 하는 실존이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피조물에 의해 하느님이 고통을 받는 모순을 견뎌내고 그 안에 인생의 신비가 숨겨 있음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참된 신앙임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종말은 그리스도교인에게 있어서 시간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말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세상을 완성할 궁극적 희망을 향해 결단을 내리는 순간 실현되는 것이다. 종말론적 희망이란 우리가 겪고 있는 죽음의 세력마저도 이길 수 없는 강한 희망이 예수님 안에서 선포되었다는 것을 믿는 이들에게서 선포되는, 즉 미래에 완성될 희망이 ‘지금 기서’ 현실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으로 성취되는 인생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이유는 결국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시길’ 비는 욥의 고백처럼 그 분께 모든 희망을 걸고 현실을 긍정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성임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 기쁨 감사 영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느님을 향한 갈망  (0) 2008.05.31
비가 내려야 무지개가 뜹니다  (0) 2008.05.18
성령 강림 대축일  (0) 2008.05.11
주님 승천 대축일  (0) 2008.05.04
기쁨은 기도, 기쁨은 힘, 기쁨은 사랑  (0) 2008.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