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信仰)
하느님이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응답, 인간과 하느님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나아가 일치하기 위하여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자세이다.
사도 신경에서 “저는 믿나이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짓는 말이다.
신앙은 종교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며,
그리스도인이 취할 기본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행복을 추구하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더욱 많은 것을 알려 하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체험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행복을
추구하며,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행복이나 진리 혹은 정의를 충족시킬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고, 결국 삶 자체를 신비로 규정하고
그 신비를 통해 더 큰 신비인 하느님께로 향하게 된다.
“하느님께로 향함”, “하느님을 앎”은 인간의 존재 문제, 세계의 의미 문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 생명의 시작이요 마침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이 인간의 주인임을 고백하고 상응하게 응답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아는 것은 행복과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절대 절명의
요청이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찾으려 하면 할수록, 그분은 우리에게 신비로
머무르는 분이시다.
그런데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가까이 오고,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알게 하며,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야훼
(출애 3,14)임을 알려 주어 모든 이를 구원 공동체로 초대하고 받아들이시는
그런 분이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은 일정한 시대, 일정한 장소, 일정한 인간
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있다.
그 계시의 절정이 바로 하느님이며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계시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오는 길이라면,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즉 신앙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며,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기본 자세이다.
<성서에서의 신앙>
[구약성서] 어원 : 신앙을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라고 정의한다면,
구약성서에서는 일차적으로 신앙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인간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우선 하느님에 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서 신앙이란 항상 하느님의 행위(actio)에 대한 인간의 응답(
reactio)이다. 구약성서에서 ‘신앙’을 가리키는 용어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자주 사용되 낱말이 “아만”이다. ‘견고하다’, ‘항구하다’, ‘신뢰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이 말은 오늘날 전례에서 “아멘”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바타”는 ‘안전하다’. ‘안전하게 느끼다’ 라는 의미이고, 이 밖에 “하사”
(피난처를 구하다. 자신을 숨기다)와 “카와”(기다리다. 긴장하다)
등의 낱말이 있다.
이 용어들의 어휘 연구를 통하여 성서에서 신앙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이 밝혀졌는데, 하나는 성실한 상대자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실재를 말과 표징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해 방법이다.
내용 : 이스라엘과 야훼와의 관계(계약, 신앙)는 제삼자를 배척하는 배타적인
관계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고, 신뢰해야 하며,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 이 관계를 잘 증명하고 있다. 야훼가 다른 신들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였을 때(창세 12,1-2), 그는 모든 의혹을
물리치고(로마 4,19), 하느님과 그분 말씀을 믿었다(창세 15,6).
그는 부르심에 순종하고 이 약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으며,
더욱이 약속의 성취로 얻은 아들마저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은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들에 희망을 두지 않고 약속을 실현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성실성과 전능을 믿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모세를 불러 자신을 드러내고 이집트에서 불행하게 사는
백성을 복된 땅 이스라엘로 데려가기 위해 “그와 함께 계실 것”(출애 3,1-15)을
약속하였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굳데 매달리는” 신앙으로
하느님께 순종하였고, 하느님은 백성과의 계약을 통해서 당신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출애 19,3-9). 이와는 대조적으로 광야 전승은 이스라엘의 불신앙
(민수 14,11 ; 신명 1,32)과 불순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신앙이
부족하여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말씀은 듣는 것’ 은 순명이며
믿음을 의미한다(신명 9,23 ; 시편 106, 245 이하). 또한 모세 전승에서는 구원
체험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신앙 수호의 선구자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역사를
신앙의 역사라고 한다면, 이사야서 7장은 그 신앙 역사의 절정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정한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히 제시했기
때문이다. 바빌론 유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나가는 데
있어 많은 난관과 유혹(우상 숭배, 형식적 예배, 군사력에 대한 신뢰)이 있었다.
이사야는 아하즈 왕이 정치적 위기에 처해 두려워 떨며 갈등하고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외세에 의존하지도 말며, 지체 없이 다윗 가문에게 한 약속을
지키실 야훼를 신뢰하라고 촉구했다(이사 7,4-9 ; 8, 5-9). 신앙은 값싼 낙관론이
아니기 때문에, 야훼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계획과 행동을 단호히
바꾸어야 한다. 야훼의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만이 참된 신앙의
자세를 지닐 수 있다. 이와 같이 신앙은 생각의 변화, 즉 회개를 전제로 하며
분명한 결정을 요구한다.
유배 중에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이 던진 신앙의 호소를 거의 듣지 않았다.
옛날 이스라엘이 모세를 믿었듯이(출애 14,31). 우선적으로 예언자들을 믿어야
했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출현, 어려운 조건으로 인한 신앙 실천의 어려움 등
장해 여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하느님 약속의 성취는 계악으로 보아
백성의 신앙에 달려 있으나, 역사상 이스라엘은 이러한 신앙을 지니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미래에 신앙의 본보기가 될 야훼의 종(이사 50, 6 ; 53장)을
예견하였다. 또 현인들은 구원받기 위하여(잠언 20, 22) 야훼께만 의지해야 함을
알았으며, 경건한 이들의 기도는 곤경 중에도 한결같이 하느님 약속을 믿고
그분만을 기다린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다(시편 33, 20-22 ; 57, 2 ; 116, 10 비교).
구약성서의 신앙은 알 수 있는 진리들의 참됨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행하고 말씀하시며,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에서 도움을 구해서는 안되며, 그분께만 온전히
신뢰하고 계약의 요구에 순종하여야 한다.
[신약성서] 어원 : 신약성서에는 ‘믿음’ 또는 ‘신앙’ 이라는 의미의 명사
“피스티스”와 ‘믿다’라는 의미의 동사 “피스테우에인” 이 자주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들은 히브리어 “야만”의 그리스어 번역이다. 신앙은 구약성서에서
언급하였듯이 신약성서에서도 역사 안에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께 대하여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를 뜻한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하였다고 해서
신앙 내용이 전혀 새롭게 변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성서와 달리
신약성서에서는 더 일관되고 더 의식적으로 ‘신앙’이 진술되고 있다.
구약의 경건한 사람은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체험에 근거하여
미래의 하느님 행위를 기대하였으나, 신약의 신앙인은 역사 안에서 행하신
하느님의 행위를 주시하였다. 즉 신약의 신앙은 예외적이고 유일한 과거지사인
그리스도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분 말고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사도 4, 12)
신앙이란 신뢰하는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과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 미래의 희망은 현재까지
성취되지 않은 것을 고대함을 뜻하나, 그렇다고 하느님의 새로운 행위만을
기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마태 24, 3 ; 2데살 2, 8 ;
2베드 3, 4).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마지막 행위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 들어올림을 받으신 분, 주님과 함께 성취된 모든 것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이다. 이 모든 내용이 성서 안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공관 복음서의 신앙 : 공관 복음서에는 “피스티스”와 “피스테우에인”이
요한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사용되었다. 신앙에 관한
진술들은 예수의 활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나타나며, 특히 그분의 선포에서 나온다.
예수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 15)라고 요구하였는데, 회개와 신앙은
계명으로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어떻게 해야 올바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선 회개의 계명은 인간이 잘못된 길을 중단하고, 주님이신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구원 사업과 행적을 통하여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또 “복음을 믿으시오”라는 계명은
복음을 받아들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복음을-믿음”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신앙이며, 구원사적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을
도래하게 하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고, 구원을 주시는 예수께 대한 신앙이다.
신앙은 “예수를 따르라”는 계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의
태도를 신앙이라고 일컬었고(루가 22,32 ; 마르 4,40 ; 9,42 ; 11,22), 백부장의
고백(마르 15,39)은 신앙의 자세와 추종의 자세를 이해하게 하였다. 예수는
당신을 따르려는 백성과 제자들에게 자신을 거부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생명을 잃어야한다고 요구하였다(마르 8,34-38 ; 9,35-37 ; 10,35-45).
예수를 따름은 회개와 믿음의 요청에 대한 특별한 응답이며, 예수께 대한
순명이다. 또한 신앙은 기도와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 9,14-29 ; 11,22-25). 예수는 제자들에게 신앙과 기도를 요청하였다.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모두 받는다고 믿으시오”(마르 11,24 ; 9. 24, 29 비교).
물론 여기에서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즉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크시고, 사랑이시고 전능하시며,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창조되었고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산을 옮기는 힘은 믿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믿음으로 청할 때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힘인 것이다.
한편 신앙과 불신은 권능 행위와의 관계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마르 8,11-13 ; 15, 32). 예수는 가시적인 표징을 요구하는 신앙을
경고하였는데, 이러한 신앙은 불신이며,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의 아들을 모욕한다. 예수는 병자를 데려오는
이들과 자신에게 오는 병자들에게 신앙을 일깨워 주거나 신앙을 요구
하였다(마르 2,1-12 ; 5, 25-34 ; 10, 46-52). 여기서 신앙은 수많은
시련과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세이다. 신앙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에 대한 신앙 그 이상의 것으로서, 예수의 선포와 활동
안에서 현실이 되는 하느님 다스림에 대한 신앙이다.
바오로의 신앙 : 바오로는 ‘신앙’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신앙’을 자신이 주장하는 신학의 핵심으로 삼고,
그 신앙의 의미를 전개시켰다. 일차적으로 그는 ‘신앙’을 초기 교회가 실천한
신앙을 기초로 하여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이해하였다(로마 10,14-17).
이는 곧 복음에 순명하는 것이다(로마 1,5). 그리고 “믿음의 말씀”(로마 10,8)
은 철저한 회개(1고린 1,18-31)를 요구한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고백이며(로마 10,9) 앎이다(2고린 4,14 ; 5,1). 그리고 신앙과 뗄 수 없는
것은 주님의 날(1데살 5,2 ; 1고린 15, 28 ; 필립 3, 21)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희망(갈라 5,1-10)이다.
바오로는 예외적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 구원 은총을
특별히 신앙과 연계시켜 이해아였다(갈라 2.16). “사람이 율법의
행업과는 상관없이 신앙으로 의롭게 됩니다”(로마 3,28). 인간의
태도 가운데 하나인 “성취하다”라는 말은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
(갈라 3-5장 ; 율법과 복음). 신앙은 말씀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은총에
온전히 의지함이며, 이 은총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행위를 의미한다(갈라 5, 2. 8). 이 신앙의 본보기가 율법 없이
신앙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이다(로마 4장 ; 갈라 3장). 신앙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라, 은사는 모든 믿는 이에게 선사된다
(1고린 12,9).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 특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다(필립 2, 29). 한편 ‘신앙’은 “신앙에로 옴”
(세례를 통해 신앙 공동체에 들어옴 ; 갈라 3, 26-29). “믿음 안에 있음”
(2고닐 13,5). “그리스도 안에 있음”(2고린 5,17). 또는 “성령 안에 있음”
(로마 8,9)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요한 복음서의 신앙 :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가 가르치는 신앙을
수용하는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신앙을 발전시켰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그분이 가져다 준 구원의 계시에 대한 결정과 태도를 신앙의 기본 자세로
이해하였고, 이 신앙을 독자들을 위하여 새롭게 설명하였다. 공관 복음서에서
예수는 회개를 요구하였지만 요한 복음서에는 회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기 위해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 13,34-35 ; 15, 12-17). 믿음과 사랑이 요한에게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고, 신앙을 명백하게 신학적으로 숙고했다는 점에서
그는 바오로와 가깝다. 바오로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에 대한
신앙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요한은 예수의 지상에서의 활동과 세상에
머무르시는 계시자와의 만남 안에서 신앙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바오로와 요한의 차이점이다.
① 신앙과 구원 : 요한의 신앙은 믿는 이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었다.
“아들을 믿는 이는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 3, 36 : 비교 : 요한 3, 15. 16 : 6, 40 . 47 :20. 31 : 1 요한 5, 13)
믿는 이는 죽음의 영역에서 하느님의 생명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요한 5, 24 : 1요한 3, 14).또한 믿는 이는 어둠에 머무르지 않고
(요한 12, 46) 빛의 자녀가 된다. (12, 36) 이러한 표현들은 비구원 영역에서
구원 영역으로 넘어감을 의미하며, 인간이 구원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요한은 역사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에게 위로부터의 탄생과 영원한 신적 생명을 보장하였다.
② 신앙의 생성과 성장, 시련과 보증 : 요한은 신앙 공동체에 신앙을
촉구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신앙이 항상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1요한 2, 18 이하). 그는 독자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견고하게
하려고 하였다 (요한 20, 30 이하). 신앙의 길은 다른 이들의 증거에의해
(1, 35-51) 열리고,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신앙이 깨우쳐지고 성장한다
(11, 21-27. 40=마르타 : 20, 27 이하=토마스).
요한은 신앙 생활 중에 있을 수 있는 모든 동기 (믿음이 생겨나고, 성장하고,
또는 인간이기에 믿음이 부족하고, 시련을 당하고)를 제자들의 신앙에
의거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제자들이 주님의 이 세상 삶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을 부활에 비추어 이해하도록 배려하였고, 마침내 성령을 통하여
예수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후에 믿는 이들은 제자들의
증거와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믿음에 도달하게 된다. 베드로는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물러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6, 68)라고 하였다. 믿음은 계시자와의 깊은
인격적 관계이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③ 신앙은 은총 : 요한은 신앙 못지 않게 ‘불신’이라는 어두운 사실에
주목하면서 “신앙은 은총”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습니다”
(6, 44). “하느님에게서 난 이” (8, 47) 목소리를 알고 따르는 사람들
(10, 27 : 18, 37)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사람들로 이해하였다 (17, 6. 9-24 : 1요한 2, 19). 따라서
요한에게 있어 믿음의 결단은 인간 스스로의 성취가 아니라 예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며,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실현된다.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 (1, 17).
야고보의 신앙 : 야고보는 한 번도 ‘신앙’을 정의 하지 않았지만, “참된 신앙”
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는 구약성서와 유대교의 유산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였다. 귀 기울여
들으시고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 사랑의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믿음의 “증명”이 야고보 신앙의 특징이다. 그의 믿음은 종말론적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야고 2, 14). 참된 믿음은 시련을 견뎌
내야 하고,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는 행함을 통하여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2, 18).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2, 17)이라고 말한 야고보는
신앙의 열매로서 선행을 요구하였는데, 그에게 있어서 선행은 신앙의
자세이기 때문이었다.
히브리서의 신앙 :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의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의
신앙을 그리스도인들의 정형으로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이 증인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6, 12-15)고 하였다. 구약성서의 의미에서
신앙의 본질은 순명 (11, 8)과 신뢰(11, 7)이다. 신뢰는 약속에 대한 믿음이며,
동시에 희망이다. 이 희망하는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게 하며
(11, 7).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은 약속된 미래와 천상적 현실이다 (11, 1).
이러한 신앙은 지상적 세계에서 천상적 세계로 눈을 들게 하며 (11, 7. 13 이하),
인내롭고 충실하게 (10, 36 : 12, 1)완전한 전형인 예수만을 바라보게
우리를 변화시킨다 (12, 2).
<독산1동 주수욱신부님 미니홈피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