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소유 (법정스님)를 읽고
많고 많은 서적 중에 하필이면 왜 불교 서적을 신부님께서 읽으라고 추천하셨을까?
우리 천주교에는 법정스님처럼 존경받는 선각자가 없단 말인가, 하는
불평을 내심으로 하였다.
그러나 평소에도 우량 독서 한 두 권쯤 읽고 싶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하는
긍정적인 사고로 금세 마음이 바뀌었다.
“진리는 하나인데” 단원에서 서술한 것처럼 내 마음도 잠시나마 이교도라면
무조건 적대시 하려드는 배타적인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 불현듯 부끄럽기만 했다.
사실 진리는 하나이며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인데
내 것은 옳고 네 것은 그르다는 편견은 나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게
얽어 놓는 바보스런 집착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작가가 회심기의 단락에서 강조 한 대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으며,
이 세상을 하직할 때도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나의 집착이
그 얼마나 어리석었음을 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했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을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가르침을 배웠다.
나는 성격이 급하고 극단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아니면 분명 아니고 옳으면 분명 옳다고 표현하는 것이 때로는 적극적이며
결단력이 있어 좋다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강하면 부러지게 되고 또한,
물이 깨끗하면 물고기가 살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설해목 단원에서 묘사한 것처럼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없던 아름드리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사뿐사뿐 가볍게 내려앉는 하얀 눈에 쌓여
깊은 겨울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를 듣는다고 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성격이 너무 급하고 때로는 직설적인 행동을 하여
타인으로부터 오해와 미움을 받은 적이 많았다.
강함은 강한 것이 아니라 강함은 부드러움에서 오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교만과 아집을 버리고
이제는 상대방을 기다려 주는 배려와 함께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 이라고 한다.
반면에 용서는 상대방을 사랑하고 배려한다는 명목 아래 용서한다고 하지만,
그 내면에는 본인의 유익을 위해서 용서를 청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 보다 당사자가 분노하고 괴로워 하다가 결국엔 참다못하여
먼저 손을 내미는 격이라고 한다.
“탁상시계“ 이야기에서도 저자는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는
흐트러지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 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녹은 그 쇠를 먹는다.” 에서도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지는 것이기에 회심(回心), 즉 마음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심화시켜야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법구경의 말을 빌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는 참 뜻이
나의 좁은 가슴에 잔잔히 남아 고동침을 이 순간도 느낄 수가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사로운 감정에 쉽사리 마음을 빼앗겨 흥분을 하고
거침없는 말투로 본인의 인격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가볍게 보며
인격이 부족한 사람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언행에 앞서 한 번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하며,
쉽사리 흐트러지는 자신이 안 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배우고 거듭 태어나야 함을
자아에게 다시 한 번 다짐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쉽게 판단해서도 절대 안 되며,
상대방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 독소가 몸과 마음을 조여서 심신을 헤친다는
가르침을 상기 시켜주어서 좋았다.
마지막 단원인 “불교의 평화관“ 에서는
불교가 사회적인 실천 윤리의 바탕을 삼고 있는 것은 자비(慈悲)이며
중생을 사랑하여 기쁨을 주는 것을 자(慈)라하고,
중생을 가엽이 여겨 괴로움을 없애 주는 일이 비(悲)이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런 마음가짐으로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석가모니와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진리가 흡사함을 알게 했으며,
마치 성경을 읽는 듯 한 착각을 하였다.
“진리는 하나인데”에서 서술한대로 사람끼리 친근해질 수 있다는 것은
밖에 드러난 거죽에서보다는 투명한 영혼에 의해서
더욱 가까워짐을 동감할 수가 있어 좋았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신부님께서 불교서적을 추천해주셨을 때 잠시나마
불평했던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부끄러울 뿐이며,
내 안에도 이교도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려드는 배타적인 감정을 버려야한다고 다짐했다.
사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며,
저자인 법정스님도 성경을 자주 읽었던 것처럼 나도 구태여 종파를 구분하지 않고
불교서적을 기회가 있는 대로 읽어야하겠다고 생각되었다.
종교적인 형태는 다르다 할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이며,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이해의 농도는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사랑에서 비롯되며 또한,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되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얽매이는 것 이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나”라는 자아를 비우고 내 안에 내가 진정 사모하는 하느님을 흠숭하며
그분의 진리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얽매임과 머무름과 그리고 미워한다는 것이
그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점점 터득해가리라 확신한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요한1서 4,12)
2007년 5월 5일 홍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