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평화방문요양센터
2008. 10. 23. 11:29
신앙과 이성
서론 : “너 자신을 알라”
인간이 실재와 세상을 알면 알수록 더욱 자신의 독특성을 깨닫게 되고,
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절박해지는 사물들과 그 존재의 의미를 묻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모두 우리 삶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대체 악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이승살이가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등의 질문들을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사람들의 인생 창조를 결정짓게 됩니다.
교회는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인간 생명에 관한 궁극적 진리라는 선물을 받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14,6)이심을
세상에 선포하는 복음 전파의 길을 달려 왔습니다.
인간들은 진리를 더욱 많이 알게 되어 삶이 더욱 아름다워지도록 만들 수 있는
일련의 원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생의 의미를 묻고 그 답을 모색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교회는 철학을,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고 복음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데 필수불가결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 1장 하느님 지혜의 계시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철학을 통해서 알게 된 진리와 계시 진리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상호 배탁적인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오고 전체가 부분 속에 감춰지며
하느님께서 인간의 얼굴을 하시고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지며
오직 신앙만이 그 신비를 올바로 꿰뚫어 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노는 “바깥으로 나가 방황하지 말고
당신 자신 안으로 돌아가시오.
진리는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을 믿고 그 분을 온 마음으로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유보되어 있는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신 직관의 한 예표로서
역사 속에 설정되어 있습니다.
제 2장 알기 위하여 믿는다.
신앙은 내면의 눈을 날카롭게 해주고 마음을 열어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신앙은 이성이 알고자 하는 바를 올바로 얻게 하고 그것을 모든 것이
진정한 의미를 얻게 되는 사물들의 궁극적인 질서 속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이성을 해방 시킵니다.
요컨대 인간 존재들은 신앙으로 조명될 때 모든 것과 특별히 자기 실존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이성을 통하여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은 피조된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을 매개로 삼아 하느님께서는 인간 이성 안에 당신의
‘능력’과 ‘신성’에 대한 직관을 일깨우십니다.
제 3장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인간의 마음 속 저 깊은 곳에는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열망하는 불씨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 존재자는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리는 바로 이 열망의 고유 대상입니다.
따라서 지각하는 것들의 참된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인식하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려내는 문제에
결코 진정으로 무관심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배격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들은 만족과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인간에게 처음에는 물음으로서 다가옵니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첫 번째 진리는 죽음의 불가피성입니다. 모든 진리는 그것이 진리라면
비록 그것이 전체적 진리가 아닐지라도 보편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비추고 있는 것은 진리의 확실성과 그 절대적 가치의
확실성에 도달하려는 바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존재자를
‘진리를 추구하는 자’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 분은 만물이 그 안에서 생겨난 영원한 말씀이시고
그 분의 전 인격 안에서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강생하신 말씀이십니다.
제 4장 신앙과 이성의 관계
철학은 영혼과 말의 올바름과 삶의 정화에서 성립되는 지혜를
얻게 해주기 때문에 지혜를 지향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철학과 그 결실들은 진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터무니없는 공격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진리를 배신하여
전투를 버리는 자들을 무장 해제 시킨다는 점에서 그리스 철학은
정당하게 포도밭을 보호하는 울타리이며 장벽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성이 어떻게 외부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신화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출구를 발견하고 더욱 적합한 길을 향해
초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정화되고 올바로 조정되기만 한다면 더 높은
사고 영역으로 고양되어 존재, 초월적인 것, 절대적인 것 등에 대한
인식의 튼튼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성을 전제로 하고 이성을 완성합니다.
신앙을 통해서 조명 받을 때, 이성은 죄의 불복종 때문에
오는 연약성과 한계로부터 해방되어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지식으로 고양되는 데 요구되는 힘을 얻게 됩니다.
‘철학적 지혜’는 자연적인 제약을 가지고 있는 지성의 실재 탐구 역량에
기초를 두고 있고 신학적 지혜는 계시에 기초를 두고
신앙의 내용들을 탐구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접근 해 갑니다.
신앙의 진실성은 이성의 용기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제 5장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교도권의 입장
교도권의 의무는 대립적인 철학적 견해들이 계시진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을 위협하게 될 때, 그리고 중대한 오류들의 씨앗을 심는
거짓되고 단편적인 이론들이 하느님 백성의 순수하고 단순한 신앙을
혼란시키면서 점차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할 때
분명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제 6장 철학과 신학 사이의 협력
윤리 신학은 인간 본성과 사회, 그리고 윤리적 결단의 일반 원리에 대한
건전한 철학적 전망을 요구합니다. 신적 계시를 통해서 제공된 진리를
배격할 때 철학은 단적으로 자신을 헤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욱 깊은 진리 탐구의 길을
스스로 차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신학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한다면 그들은 일부
근대 철학자들에게서 일어낫듯이 필시 혼자만의 힘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들을 숙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역시 사색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믿으면서 사고하고 사고하면서 믿습니다.
만일 신앙이 사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남녀인간의 궁극적 운명을 계시하고,
그들이 세계 속에서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보편적인 설명을 제공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이 철학이 각 사람이 타고난 종교적 충동에 상응하는
이 의미의 자연적 토대를 탐구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이고 총괄적인 의미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철학은 그 과제에
부적합 할뿐 아니라 거짓된 철학입니다. 철학이 진리 인식 능력, 다시 말해,
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물과 지성의 일치를 통해서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인식 가능성을 확증해 줍니다.
우리는 경험 속에만 갇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형이상학적 지평이 없는 신학은 종교적 경험의 분석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또 게시 진리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신앙의 이해’를 가능하게 해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주의는 진리를 실용성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이 응답하도록
불린 진리의 요구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며, 과학주의 또한, 인생의 의미 물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비합리적인 환상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윤리적 원리들에 입각한 이론적 숙고나 판단을 배격하는
실용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의 주요 목표는 계시에 대한 신앙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역사의 제약을 받고 있고 또 다르게 구성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 존재자는 언어 형상을 능가하는 진리들을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결코 시간과 문화로써 한정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알려지지만 또한 역사를 능가합니다.
윤리 신학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의 근거들을 해명할 줄 아는
정밀한 연구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윤리 신학은 주관주의적이지도 않고
공리주의적인 것도 아니면서 선의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윤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결론
진정한 지혜인 철학의 매개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은
오늘날 자신들의 인간성이 확인되면 될 수록 그만큼 더 그들은 복음을
신뢰하고 그리스도께 개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철학적 사고는 우리의 신앙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유일한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이성의 빛 속에서 그 규칙들에 따라 성찰하고 언제나 하느님 말씀 덕분에
가능해진 더욱 깊은 이해의 안내를 받을 때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은
신적계시가 선언하는 진리를 아직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하고 호소력 있는 성찰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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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점차 들어가면서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위안을 얻게 되고,
세속의 것들은 금세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때로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분명 초월적인 존재자가
존재하심을 언젠가부터 마음 한 편에 짙게 깔리면서
이곳저곳을 쫓아다녔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임을 만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듯,
인격적으로 한 말씀만이라도 아니면, 꿈속에서라도 만나 뵙고 싶은
열망을 불태우다 못해 답답한 나머지
가톨릭 교리 신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에서도 만사가 잘 풀릴 때보다는 무엇인가 꼬이고 힘에 부칠 때
자신도 모르게 절대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으로부터 힘을 얻게 되고 참 평화는 물론
천상을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처럼 거창하게 철학을 통해서 진리를 알았다기보다는
고된 삶과 그리고 갈등과 유혹에서 여러 번 헤매다 보니,
어렴풋이 삶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방법을 습득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순명하며 인내 할 수 있도록 인간 존재자로부터
깨달음을 주셨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합니다.
‘철학적 지혜’는 자연적인 제약을 가지고 있는
지성의 실재 탐구 역량에 기초를 두고 있고,
신학적 지혜는 계시에 기초를 두고 신앙의 내용을 탐구하여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해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윤리 신학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의 근거들을
해명할 줄 아는 정밀한 연구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윤리 신학은 주관주의적이지도 않고
공리주의적인 것도 아니면서 선의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윤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계곡의 물이 시냇물 되어 바다에서 만나듯 우리 인간 또한,
삶과 자연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 잔치에 초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철학은 하느님 나라를 터무니없이 음해하고 진리를 배신하여
전투를 벌이는 자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무사와도 같으며
또한, 하느님 나라를 보호하는 울타리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의 신앙은 밀물과 썰물이 되어,
만조 때에는 기쁨의 포만감으로 행복해 하다가도
물이 빠져나가는 썰물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의심하는
불안한 신앙생활에서,
이제는 그리스도교 철학을 통하여 신앙의 속살을 알차게
찌워가고 있음을 감히 고백하면서
육에 머물기보다는 말씀으로 변화하여 순간마다
저희 삶이 부활하는 기쁨으로 참 행복을 누림에
끝없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2008년 10월 23일
홍일표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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