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금해요

무속과 기독교

참평화방문요양센터 2008. 9. 20. 20:20

무속과 기독교 누구나 기독교가 외부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라는 것은 알고 있다. 우리들이 듣기 서툴고 말하기 어려운 이름들이 성경 안에 꽉 차있다. ‘아멘’이니 ‘할렐루야’니 하는 말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곡조와는 다른 찬송가를 부르는 등 다분히 이국적 종교이다. 이러한 외래어적인 것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낯설기 때문에 ‘복음’이니 ‘천주’니 하는 식의 한자어로 바꾸거나, ‘하나님 아버지’란 식으로 대치하여 부르고 있다. 필자는 어렸을 때 기독교인들이 ‘아버지’를 부르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느꼈다. ‘자기 아버지가 들으면 얼마나 섭섭할까’, ‘집에다 아버지를 두고 어디서 아버지를 찾는가’ 하면서 이상한 종교도 다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기독교는 이 땅에 낯선 종교로 들어와서 박해 받으며 순교를 통해서 이 나라에 뿌리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이제 가는 곳 마다, 마을마다 우뚝 선 교회를 볼 수 있다. 처음 들어올 때의 낯설고 이상한 기독교가 어느새 한국 땅 어느 곳에나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수와 함께 교회의 규모도 초대형화 해서 어떤 교회는 20만 명 가까운 사람을 모은다고 한다. 이러한 급속한 기독교의 팽창이 세계인을 놀라게 하고, 동방박사의 나라로 주목 받고 있다. 불교나 유고와 같은 외래 종교가 전래하여 토착화 하였으나, 기독교는 이국적이고 낯선 종교로 뒤늦게 들어와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 미만이라는 것과는 너무나 수적인 대조를 이룬다. 한국 기독교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성령 운동이다. 유동식 교수는 크게 두 가지로, 유교적 전통과 무교적 전통에 입각한 신앙 운동으로 분류하여 개괄하고 있다. 그는 이 두 형태의 성령 운동은 하나의 한국 교회의 신앙 운동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기둥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후자인 무속과 기독교를 관련시켜 생각해 보자. 기독교가 이국적 외래 종교라면 무속은 자국적 토착 신앙이다. 무속은 이미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들과 접한 종교사적 경험이 있다. 기독교도 박해와 순교를 통해 세계 종교로 발전한 종교이고, 무속 또한 외래 종교와의 접촉을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마찰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워낙 특성이 다른 두 종교의 만남은 서로 이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만남에서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이 나라 전래 당시부터 기독교의 토착화를 부르짖었다. 토착화란 기독교의 수적 증대, 확보와 함께 신앙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상징적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것은 1960년대의 기적과 같은 한국 교회의 부흥으로 인해 아주 낙관적인 전망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은 단순히 수적인 팽창,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여기서 필자는 무속의 입장에서 기독교 토착화에 대해 느낀 점을 말해보고 싶다. 첫째, 기독교 토착화는 수적 증대보다는 신도 수의 안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자의 수가 줄었다 늘었다 하는 유동 인구를 많이 가진 교회보다는 고정적 신도를 가진 교회를 보다 안정된 교회라 생각한다. 그 밑바탕은 우선 신앙적인 데 있다고 생각된다. 기독교인이 기독교를 떠날 경우 어떠한 신앙적, 종교적 제재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떠날 경우 죄의식이나 신벌 의식이 수반되지 않거나 약하다. 무속은 그러한 신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 무당이 무업을 버리면 신벌을 받아서 병을 앓게 되고 심지어는 죽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당은 신을 모시고 경배하게 되어 있다. 무당뿐만 아니라 신자라 하여도 대대로 무속을 믿던 집안에서 다른 종교, 특히 기독교로 개종하면 집안이 망하거나 재산을 당한다는 종교적 신벌의식이 있다. 즉 열린 문으로 들어온 신자를 나가지 못하게 닫아 버릴 종교적 구조를 가지지 않은 것이 기독교이고, 반대로 그것을 가진 것이 무속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수적 팽창은 수적으로 그칠 가능성이 짙으며, 반대로 감소할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적인 증대만이 치중하는 토착화는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음에는 개종의 방법이다. 기독교에의 개종은 처음부터 개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이 개인적 신앙인 점도 있지만 나라에 따라서는 집단 개종이 가능하나,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과 마찬가지로 개인 개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가족이나 친족 또는 지연 중심의 집단적 개종이 개인 개종보다 안정적인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것과는 대조적으로 무속은 가정 신앙이나 마을 신앙으로 밀착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 개종에 무속이 구조적인 장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기독교의 수적 증대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안정시키기 어려운 요인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이국적인 외래종교이기는 하지만 실은 무속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다. 흔히 고등 종교라면 창시자가 있으며, 경전과 교회를 가진 조직 종교라 한다. 그러나 무속도 창시자가 없다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다. 세례를 주는 기독교 의식은 물로 부정을 가시는 무속 의례에 대응한다. 물론 의례의 형식이 비슷하다고 본질이 같다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의 토착화는 아마 그 본질을 한국 교회나 신도에게 뿌리 박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강한 배타성을 지닌다. 만일 기독교가 본질을 잃고 외형적으로 무속에 닮아 간다면 그것은 습합이나 영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본질이라 생각되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죽음에 대한 신앙, 인간은 죽어서도 영생한다는 영혼 불멸설을 믿는 데는 기독교나 무속이 다르지 않다. 예수의 부활이나 죽은 이의 불멸은, 생명은 죽어도 사는 연속성에 대한 신앙이다. 무속에서는 사람은 그냥 죽어 버리지 않고 의례에 의해서 조상신이 된다. 이런 점은 기독교의 부활의 의미와 비슷하다. 그러나 기독교이 부활은 죄의 의식과 윤리적 구원과의 관련이 짙다. 무속은 죽은 이로부터 오는 탈과 생가화복이 중요한 문제이다. 기독교의 죽은 자는 영적 세계에 존재하고 완전히 인간과 분리되어 버리지만, 무속의 조상은 자손의 생사화복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존재이다. 조상은 산 사람들과 함께 씨족과년을 형성하고 있어서, 죽은이 이면서도 산 사람의 기능을 한다. 기독교의 추도회는 유교의 조상 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초기 기독교 전래 과정에서 갈등이 크게 일었고, 지금이나 장차에도 화합하기 어려운 요소를 갖고 있다. 이런 조상관념 위에 기독교의 토착화는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질병관이다. 성경 가운데 예수가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무당이 우환굿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점은 매우 혼동하기 쉬운 부분이다. 실제로 많은 교회에서는 사탄이나 잡귀가 병의 원인이라고 그것을 퇴치하여 병을 치료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치병을 그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아니고, 사랑의 종교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속에서는 중요한 목적이 되고 있다. 요즈음에 크게 부흥하는 기독교 교회들은 이를 중요한 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런 점은 기독교의 토착화라기보다는 기독교의 무속화라 할 수 있다. 셋째는 감사에 대한 것이다. 교회에서 아주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의 하나가 ‘감사합니다’이다. 말이나 물질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 물질로 표현한 것이 ‘헌금’이다. 무속에서도 ‘굿돈’이 있고, 특별히 신(무당)의 기분을 돋우기 위해 팁처럼 지불하는 ‘별비’가 있다. 목사는 감사 헌금에 ‘기도’하여 주고, 무당은 별비에 ‘추원’하여준다. 매우 비슷한 형식이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느 다르다. 헌금은 신의 은총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일방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굿돈은 무당의 수고나 신에게 보답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전자가 일방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상호적인 것이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아무런 기대없이 전하는 선물과 같은 것이 헌금이다. 재수나 복을 빌기 위한 것이 ‘굿돈’이다. 얼마의(굿돈으로) 비용을 들여 재수굿을 하면 그 많은 재산을 벌 수 있다거나 좋은 운수를 가져온다고 한다. 두 가지의 감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최근에 크게 부흥하는 교회에서의 감사 헌금은 무속적인 것이 많다. 필자는 얼마 전에 어떤 부흥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연구자로서가 아니고 신자로서 참가하였다. ‘기도를 해 주었더니 부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설교가 끝나고 여성들의 병을 고친다고 하였다. 헌금에 하나씩 호명하면서 기도해 주었다. 나의 귀에는 무당의 ‘추원’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다. 결국 이 부흥회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헌금이 걷혔다. 교인들은 대성공이라고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무속화를 느꼈다. 그것도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말이다. 한국 교회가 전주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커지는 교회에서 이런 기독교의 무속화 현상을 보기 어렵지 않다. 한국 기독교의 성장에 놀랄 필요는 없다. 기독교가 본질을 지키면서 심화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회와 신도의 수, 행사와 대규모화, 기독교 문화의 일반화-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카드, 크리스마스 케이크- 따위로 열기있는 기독교회가 진행되며 기독교의 본질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결국 기독교도 한국인이 믿는 신앙일진대 한국적 바탕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운동이 무속에서 신비성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서광선 박사는 부흥하는 한국 교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기록 분석하여 기독교 토착화의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서울 시내의 교회당 수가 다방 수를 200개나 웃도는 숫자로 늘어나는 한국 교회 부흥의 내면에서 무속적 기반을 파헤쳤다. 그는 ‘성령운동’이 샤머니즘의 영향을 ‘다소간’만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변질’을 하고 있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성령운동자’들은 설교나 교인들의 신앙 형태를 살펴볼 때 그 동기나 목적이 샤머니즘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한국성령운동의 현상과 구조>, 대화출판사, 1981.9) 이상에서 언급한 것이 한국 기독교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도 아니다. 다만 기독교 토착화의 참된 의미를 찾아보고 싶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