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금해요

천주교의 전래와 조선 천주교회사

참평화방문요양센터 2008. 8. 8. 08:32
    
    
    천주교의 전래와 조선 천주교회사 선조 말년부터 중국에서 서양서가 흘러들어와 벼슬아치나 선비들이 탐독하는 것을 유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권철신 정약전 이벽 이익등은 물론 많은 남인 학자들은 단지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는 학문적인 관심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진리에 대한 갈증과 인생의 해답을 얻으려는 구심도에서 천주학을 대하고 받아 들였으며 정조3년(1779년) 겨울에 열린 천주교 교리에 관한 강학이 그 발달이 되었다. 천주교에 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는 북경으로부터 보다 많은 천주교의 서적을 구할 수 있기를 갈망하던 중 이벽 친구인 이승훈이 계묘년(1783년) 동지사행 서관장으로 임명된 그의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천주당을 찾아가 예수회 신부를 만나 그랑몽 신부에게 교리를 배우고 1784년 1월말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귀국할 때 많은 천주교 서적은 물론 십자가 상본과 성화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승훈은 3월 24일경(음력) 서울에 도착한 직후 이 책을 이벽에게 전달하였고, 이벽은 수표교 부근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이 교리서들을 통해 교리를 연구하면서 비로소 천주교 교리를 자세히 알게 되었으며 그 후 정약전, 정약용 형제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을 기념하여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를 모시고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200주년 행사를 가지면서 103명 성인에 대한 시성식도 거행 하였는데 1784년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고 인정한 것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벽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명례방 김범우의 집으로 장소를 옮겨야 할 정도로 많은 교우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보았다는 것이 교회와 정부 측의 기록에 규명되었기 때문이다. 1792년 조선교구가 포르투갈 보호권 교구의 구베아 주교 개인에게 위임되었으며(교황 비오6세) 최창현과 최인길은 선교사 영입을 추진하면서 지황을 밀사로 선정하였다. 윤규일 지황 박요한은 1739년 10월 동지사 일행과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과 의주에서 머물면서 구베아 주교로부터 성무 집행에 필요한 특별권한을 받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준비했다. 1794년 12월 3일 (양력12월 24일) 주문모 신부는 한복으로 변복하고 의주 변문으로 잠입하여 1974년 12월14일(양력1795년1월4일)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여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거처를 정하였다. 그 당시 신도 수는 약4,000명이었으며 1795년 부활 대축일(4월5일)에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이 것은 조선교회가 창설된 이래 최초로 거행된 미사였다. 1800년 11월(음력) 정조의 국상이 끝나자 노론 벽파에서는 남인 제거에 나섰고, 정부는 이미 천주교인들의 열명록을 찾아내 박해가 시작되었다. 1801년 1월 9일(음력 2월21일) 김 대왕대비의 천주교 박해령으로 오가 작통법 시행 1월 29일(음) 책롱사건 3월 12일(음) 주문모(야고보)신부 자수로 인해 그와 연루된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였다. 3월 29(음) 황사영 (알렉시오)이 체포되고 함께 백서가 발각 됨으로써공식적으로 신유박해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오가 작통법을 시행하면서 교우들의 집과 재산을 버리고 천주를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 산속으로 피신하였으며, 이로 인해 각지에서 교우촌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12년 교황님께 1차 청원서 발송 1825년 정하상과 유진길등이 교황님께 2차 청원서 발송 1827년 표교성성 장관이 조선교회에 대한 표교 활동을 담당해 줄 것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장 랑글로아 신부에게 요청. 전교회 에서 이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당시 샴의 부주교였던 브뤼에르 주교가 자원하고 나섬. 1831년 9월9일 조선 대목구 설정: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초대 조선 대목으로 임명. 1836년 앵베르 신부가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 1837년 12월30일 조선의 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 서울 도착 (12월 18일 조선에 입국) 1838년 12월1일 앵베르 주교가 교황님께 조선교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의 주보를 성모무염시태로 정해줄 것을 요청. 1839년 기해박해 1839년 7월5일 대왕대비는 포도대장에게 천주교도 수색에 철저할 것을 명한 후 하루빨리 멸절시키도록 재촉하였으며, 시간이 지체되면 조정의 사대부들까지 물들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9월2일 이지연과 대왕대비는 중국으로부터 천주교 서적과 성물의 유입통로를 원천적으로 봉쇄했고 앵베르 주교는 체포되기 전 두 선교사에게 교우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자수할 것을 서신으로 권고했다. 두 선교사는 9월6일 서울에서 충청도 홍주에 파견된 포교들에게 자수, 그리고 9월21일 세 선교사는 국사범으로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9월 22일에는 정하상과 유진길이 서소문에서 처형되었고 같은 장소에서 26일에는 조신철등 9명이 처형되었다. 1841년 8월22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성모무염시태는 조선 대목구의 주보로 하되 지금까지 지켜오던 성요셉(북경교구 주보)도 함께 기억하도록 허락하였다. 1845년8월 17일 상해 연안 김가항성당에서 김대건 사제 서품 8월 24일 상해에서 약30리 떨어진 곳에 있는 횡당성당에서 첫 미사 봉헌 1846년 병오박해 1846년 11월2일 성모 성심회 창설(수리치골: 안양 수리산) 조선의 선교사들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께 대한 신심을 북돋고 더욱 완덕 생활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프랑스 파리에 있는‘승리의 성모성당’ 에 본부를 둔 ‘무염 성모 성심회’의 지부를 조선 땅 수리치골 (당시 다블뤼 신부의 거처)에 두고 신자들의 신심 연마함은 물론 전국적으로 그 신심 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이 신심 단체가 조선 교회 최초의 선모 신심 단체였으며 오늘날 ‘성모회’ 라고 말하는 한국 교회의 본당 여성 단체는 바로 이 단체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1849년 예수회 마레스카 주교에 의해 조선인 2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신부 서품. 1858년 2월 11일부터 루르드 성모 발현 시작(7월16일까지 18회) 1860년 경신박해 1861년 10월 22일 경에 교구장 베르뇌 장 주교는 조선교구의 포교지를 전부 거룩한 동정 성모님께 봉헌하고 나서 조선교구의 각 구역을 성모 마리아의 죽일 중 하나의 이름을 가지도록 8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담당 심부를 배치하였다. 1866년(고종3년)-1871년(고종8년) 병인박해 1876년 루르드 성당에 조선을 봉헌하는 기념 비문을 축성 ◇ 루르드 성당 벽의 기념 비문 내용 “‘성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 결백하신 동정녀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험한 항해의 위험에서 보호를 받은 조선 반도의 선교사들은 봉헌되는 루르드 성전 내벽 면에 돌을 부착하고 돌 위에 글자를 새겨 이렇듯이 큰 은혜를 길이 기념하고자 하는 바이다. 천주 강생 일천구백칠십육년.“ 1886년 6월 4일 한불 조약 조인으로 선교사들에게 신교의 자유가 주어짐(조선인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 아님) 1888년 6월 8일 조선 교구를 예수 성심께 봉헌하는 장험한 미사를 올려 신교의 자유를 얻게 된 은총에 감사를 드렸다. 188년 말 16명의 성직자와 20명의 신학생 1만5천4백 명의 신자와 본당 4곳 1892년 8월 5일 면동 성당 정초식 거행 1893년 9월 25일 약현 성당 축성 1894년 황사영백서의 원본 발견 동학혁명과 청일 전쟁 1896년 10월11일 대원군의 부인 민부대부인이 마리아란 본면느오 영세 1898년 5월 29일 면동 주교좌 성당 축성 1911년 4월 8일 전라도 경상도의 남부 지방을 분할하여 대구 대목구 설정 1925년 7월5일 교황비오 11세 가 한국 순교 복자 79위에 시복식 거행 1927년 3월 17일 평양 교구 창설-메리놀 외방 전교회에 위임 1941년 교세 : 9개 교구, 5명의 주교, 4명의 교구장과 1백 69명의 외국인 사제, 1백 39명의 한국인 사제, 68명의 외국인 수녀, 315명의한국 수녀, 279명의 신학생과 18만 명의 교우 1942년 12월 20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주교 (노기남 서울 대교구장)로 승격되는 성성식을 명동 대성당에서 거행 1968년 10월6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1백여 명의 한국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베르뇌 주교이하 24명을 복자위에 올리는 시복식 거행 1969년 4월 28일 서울 대교구의 김수환(스테파노) 대주교 추기경 서임. ※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3월10일에 12개의 대목구를 교구로 승격시켰고, 서울, 대구, 광주 등 3대목구들을 대주교 교구(대교구)로 설정함으로써 한국교회는 자치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로 수원교구(1963년10월7일),원주교구(1965년3월22일) 마산교구(1966년2월15일), 안동교구(1969년5월29일) 제주교구(1977년 3월21일), 의정부교구(2004년 6월24일)가 신설되어 오늘날 3개의 대교구관구에 14개의 교구와 1개의 면속구(덕원)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69년 3월28일에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되었고, 2006년 2월22일에는 현 서울대교구장 정진석(니콜라오)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천주교의 동양 전래와 조선 천주교회사』 이영춘신부 지음에서 발췌 참 평화 무지개 뜨는 곳